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지리산을 가는 길이면 마치 의식처럼 치르는 지리산 노래듣기
안치환의 목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기란 참 힘들다.
끊임없이 현실적인 갈등과 다퉈야 하고 실행코자 하는 굳은 의지 또한 필요한 일이다.
나의 짝사랑 지리산을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고달픈 속내만큼이나 험난한, 그 산을 오르고자 하는 마음만 늘 간절할 뿐이다.
바래봉 1167고지, 용산마을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새벽 다섯 시의 산길을 랜턴에 의지하며 걸어간다.
바람 잦아든 겨울공기가 달작지근하다.
짙은 어둠 속 산등성이는 잠든 야성의 짐승처럼 묵직하게 누웠다.
산은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고 여명이 움튼다.
운봉읍의 주황색 불빛이 드문드문 내려다보인다.
바래봉 능선을 오르며 올 겨울 귀한 눈밭을 만난다.
사람들의 굳어진 감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 중 하얀 눈만 한 게 있을까 싶다.
모두들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매서운 바람 부는 바래봉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구름에 가린 천왕봉 주능선, 해는 떠오를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일행 중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이가 아무도 없었나 보다.
기다림은 잠시지만 심한 한기를 어쩌지 못하겠다.
어렴풋한 서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리산의 유장한 산 그리메를 바라보며 팔랑치로 하산한다.
길 양편 구상나무 위로 탐스런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모두 멋진 모델이 되어본다.
팔랑마을에서 원천마을로 가는 여유로운 이 길의 이름을 신선둘레길이라 했던가.
이름에 걸맞게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너르고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솔잎 낙엽 진 푹신한 길을 걸어 팔랑마을 억새집에 도착했다.
삭은 억새지붕과 낡은 흙벽이 할머니의 구부정한 허리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풍화작용하며 곰삭아 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젠 과거가 되어 쉬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억새 집과 할머니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계시기를 바라본다.
질항아리 뚜껑에 담긴 막걸리 한사발의 시원함과 무전의 달큼함이
아직도 혀끝에 맴도는 것 같다.
곰재를 넘으며 오랜만에 뵌 한 산우가 묻는다.
다음 책은 언제 나오는지를
어쩌면 매일매일이 책쓰기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잘 써보려 노력하며 일상이라는 내용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인생이라는 단 한권의 책을 위해서 말이다.
어떤 페이지에서 어떤 이야기가 쓰여질지는 모른다.
후회할 일들은 쓰이지 않기만을 바라게 된다.
지리산을 걸으며 만난 오랜 길동무들이 이젠 정말 친구가 된 것 같다.
서로의 꿈을 일깨워주며 오래도록 함께 걷는 인연이면 좋겠다.
나의 짝사랑 지리산,
바래봉의 넓은 능선과 여유로운 신선둘레길에서 반가운 이들과 만나
웃고 즐기며 그 길을 독차지했던 행복한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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