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지리산 바래봉 신선둘레길

정진숙 2016. 12. 30. 08:22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지리산을 가는 길이면 마치 의식처럼 치르는 지리산 노래듣기

안치환의 목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기란 참 힘들다.

끊임없이 현실적인 갈등과 다퉈야 하고 실행코자 하는 굳은 의지 또한 필요한 일이다.

나의 짝사랑 지리산을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고달픈 속내만큼이나 험난한, 그 산을 오르고자 하는 마음만 늘 간절할 뿐이다.

 

바래봉 1167고지, 용산마을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새벽 다섯 시의 산길을 랜턴에 의지하며 걸어간다.

바람 잦아든 겨울공기가 달작지근하다.

짙은 어둠 속 산등성이는 잠든 야성의 짐승처럼 묵직하게 누웠다.

산은 조금씩 잠에서 깨어나고 여명이 움튼다.

운봉읍의 주황색 불빛이 드문드문 내려다보인다.

 

바래봉 능선을 오르며 올 겨울 귀한 눈밭을 만난다.

사람들의 굳어진 감성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 중 하얀 눈만 한 게 있을까 싶다.

모두들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매서운 바람 부는 바래봉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구름에 가린 천왕봉 주능선, 해는 떠오를 가망이 없어 보인다.

일행 중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이가 아무도 없었나 보다.

기다림은 잠시지만 심한 한기를 어쩌지 못하겠다.

어렴풋한 서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지리산의 유장한 산 그리메를 바라보며 팔랑치로 하산한다.

 

길 양편 구상나무 위로 탐스런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모두 멋진 모델이 되어본다.

팔랑마을에서 원천마을로 가는 여유로운 이 길의 이름을 신선둘레길이라 했던가.

이름에 걸맞게 산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걷는 너르고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솔잎 낙엽 진 푹신한 길을 걸어 팔랑마을 억새집에 도착했다.

삭은 억새지붕과 낡은 흙벽이 할머니의 구부정한 허리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풍화작용하며 곰삭아 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젠 과거가 되어 쉬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억새 집과 할머니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계시기를 바라본다.

 

질항아리 뚜껑에 담긴 막걸리 한사발의 시원함과 무전의 달큼함이

아직도 혀끝에 맴도는 것 같다.

곰재를 넘으며 오랜만에 뵌 한 산우가 묻는다.

다음 책은 언제 나오는지를

어쩌면 매일매일이 책쓰기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잘 써보려 노력하며 일상이라는 내용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인생이라는 단 한권의 책을 위해서 말이다.

어떤 페이지에서 어떤 이야기가 쓰여질지는 모른다.

후회할 일들은 쓰이지 않기만을 바라게 된다.

지리산을 걸으며 만난 오랜 길동무들이 이젠 정말 친구가 된 것 같다.

서로의 꿈을 일깨워주며 오래도록 함께 걷는 인연이면 좋겠다.

 

나의 짝사랑 지리산,

바래봉의 넓은 능선과 여유로운 신선둘레길에서 반가운 이들과 만나

웃고 즐기며 그 길을 독차지했던 행복한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