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병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장병장 마지막 면회

정진숙 2012. 4. 25. 11:31

 

이른 아침 춘설이 내린다. 아들에게 면회 가기로 한 날인데 3월 하순의 봄눈 치고는 너무 많이 내리고 있다. 반가움은 잠깐이고 강원도 갈 일이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염려 되었던지 아들에게서 올 수 있겠냐는 안부전화가 왔다. 1월에 예정된 휴가가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밀리고 밀려 못 나오고 있었다. 아들을 위로한답시고 잡아 둔 면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가겠노라 안심 시키고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출발했다. 다행히 도로 위의 눈은 말끔히 녹아 길은 가는 내내 편안했다. 아들 덕분에 때 아닌 눈 구경까지 하게 되어 여행이라도 나서는 것 마냥 들뜬 기분이다.


부대는 첫 면회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초소로 쓰이던 건물을 헐고 임시초소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더 멋진 위병소를 만들기 위해서라는데 휑한 바람이 들이치는 임시 초소는 나무 칸막이 안에 난로 하나가 있지만 온기라고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추위에 떨며 보초 선 장병들의 모습이 못내 안쓰럽다. 잠시 후 아들이 여유 있게 걸어 나온다. 이젠 병장 군번을 달았으니 느긋할 만도 하다.


다목리 대성산 회관에서 체크인을 하고 1층 식당으로 갔다. 지난 번 맛나게 먹었던 삼겹살에 부대찌게를 주문했다. 배불리 실컷 먹고는 아들이 넌지시 말을 꺼낸다. 아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대학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기다리던 반가운 말이었다. 군대에서 지내는 동안 세상사는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제대하기를 내심 기대한 우리에게 아들은 좋은 선물을 준다. 사회란 곳이 자신감 하나로만 살아갈 수 있는 만만한 데가 아님을 나름대로 느낀 모양이다. 씁쓸한 결론이지만 아들이 삶의 방식들을 하나둘 알아가는 것이 고맙다. 독불장군으로야 살 수 없으니 어쩌랴.


늠름하게 군 생활에 잘 적응하고 기특하게 잘 이겨낸 대한의 남아 장병장. 올 6월이면 제대한다. 유난히 군 관련의 사건사고가 많았던 지난 이십여 개월 동안 울고 웃고 걱정하고 가슴 쓸어내리며 아들과 그 시간을 함께 했다. 그 힘겹던 날도 아쉬움으로 기억될까. 더디기만 하던 시간도 지나고 나니 참 빠르게 여겨진다. 아들이 오고가던 다목리 길을 사진으로 담는다. 44년을 한 자리에서 이발사 노릇을 했다는 하동이 고향이라는 아저씨의 다목이발관, 1박2일 멤버가 다녀갔다는 중화요리 효동각. 사방 백 미터도 안 되는 좁은 다목리 시내와 아들과 함께 묵었던 대성산회관. 이 모두가 어미인 내게도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갑작스런 일정변경으로 아들은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복귀해야만 했다. 속상하지만 그나마 하루 외박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을 찾으니까 없다. 아뿔싸, 조금 전 부대에 귀대하겠노라고 통화하는 것을 보고는 못 건네받고 그냥 온 것이다. 남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다목리 시내에 있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들이 웃으며 하는 말, 까딱했으면 모르는 사이 영창 갈 뻔 했다나 뭐라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그 말 속에는 긍정의 의미가 담겨있다지 않는가. 감사할 여지는 어느 순간에나 있다.


감성마을 이외수 작가 댁을 지나 사창리로 가는 사이 산자락 옆 밭으로 내려온 멧돼지를 발견했다. 어린 티가 역력한 새끼 두 마리가 눈 위를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린다. 먹이를 찾는 모양이다. 왜 자꾸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지. 아들을 두고 가는 허전함 탓일까.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도 하다. 남은 세 달이 다시 길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