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9/23(일) 성곽돌기
산행지: 서울 성곽돌기
산행일시:2012년 09/23(일) 오전 08시 30분 동대입구역에서 출발
산행코스: 광희문-흥인지문-혜화문-숙정문-창의문-인왕산-돈의문-숭례문-남산 (산행시간) 8시간
산행대장:깊은샘대장
산행총무:가노라~
참가자:깊은샘대장,가노라,플러스,정이,정아,무정유,현현하,쏘주만,황매산,아까,봄비,공간사랑
대장,총무,정회원 이상,준회원,비회원 순 (대장,님자등 존칭생략)=총 12 명(필수)
찬조기금: 10,000 원(대장,총무제외)
조선의 내사산 이라 함은 왕궁을 에워싸고 있는
목면산(남산),낙산,북악산,인왕산을 일겉는 말이다.
서울 성곽돌기 란 내사산을 연결하는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이다.
동심원을 걷다 보면 방향에 따라 사대문과 사소문이 위치하고 있다.
물론 현재 산중의 성곽은 거의 복원되었지만
평지의 성곽은 거미줄같은 도로사정 때문에 완전한 복원이 요원할 것이다.
비록 끊어진 성곽이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돌아가 조상의 숨결을 느껴 보시라.
역사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겠지만 내 생각으론,
단순한 과거의 캐캐묵은 기록이나 흔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와도 같은 것이다.
내가 하는 결정과 행동은 이전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듯,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배우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서울성곽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위해
조금씩 옛모습을 복원하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동대입구역에서 08시 30분에 12분의 산우님이 만나
깊은샘 대장님의 리딩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첫번째 만나는 광희문,
현재의 위치는 최초 건립 당시의 위치가 아니고 도로때문에 조금 옮겼다고 한다
창의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문이 당시의 자리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약간씩 옮겼다고 한다.
광희문은 시신을 옮기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현현하님이 의문을 제기한다.
보통 시구문은 서쪽에 두는데 비해 광희문은 동쪽에 위치한 문인데
왜 시구문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인즉,당시에는 여기에서 가까운 왕십리에 공동묘지가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필요에 의해 실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해석이다.
지금이야 신당동이 떡복이로 유명하지만 이전에는 점집이 많았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짓는 문이니 우연의 결과는 아닐 것이다
이전에 동대문 운동장이 디자인센타와 역사문화공원으로 변신을 했슴다.
원래 이 자리는 훈련도감의 하급부대인 하도감과
고종때 창설(1881년)된 최초 신식 군대 별기군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때,반란을 일으킨 하급군인들에 의해 일본인 13명이 살해되어...
민비시해가 일어난 을미사변(1895)과 외교,재정,국방을 박탈당한 을사조약(1905)을 거쳐
1910년에 경술국치인 한일합방으로 완전히 국권을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병영터를 없애고 싶었겠죠.
1926년에 일제가 서울도성을 허물고 군병영으로 사용하던 터에
최초 종합 경기장으로 만들지 않았나 추측합니다 만,직접적인 동기는
일왕의 황세자가 식민지를 방문한 기념으로 지었다는 설도 있더군요.
해방을 후,혼란기에 신탁통치의 찬반집회를 비롯하여 각종 집회가 열렸던 공간이었으며
스포츠경기를 통해 각박한 삶에 지친 국민들의 응어리를 토해내던 열광의 도가니였다.
서울시민이라면 어찌 여기에 하나쯤 추억이 없으랴 만은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니 속이 다 후련하다.
좌,우 한개씩 남겨놓은 조명탑이 옛 영광의 편린들을 비추며
여기가 동대문 운동장이었음을 침묵으로 알리고 있다.
공사를 하던 도중 700여년 묻혀있었던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형태로 보아 수로였음을 알 수 있다.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5개의 수로이다.
당시에 지하로 물길을 만든 조상들의 치수 설계능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흥인지문(동대문)이다.
유교의 근간이 되는 인,의,예,지,신을 넣어서 사대문을 작명을 한 것으로 보아
과연 성리학의 나라 답다.
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숭례문,의 사대문과 보신각에 한자씩 들어있다.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였는데 사대문 중에 유일하게 유교의 덕목을 넣지 않은 성문이지만
연유는 아마도 풍수의 영향때문이라 짐작한다.
대신 지(智)에 해당하는 소문은 지금의 상명대 아래 있는 홍지문에 사용하였다.
흥인지문이 숭례문과 더불어 큰 탈없이 원형을 그나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임란때 일본장수가 한양으로 입성한 개선문이라 하여 그냥 두었다는 설이 있다.
흥인지문에서 낙성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동대문교회,
우리나라에서 3번째 지어진 교회라 하는데 조만간 수원 영통으로 옮긴다고 한다.
한양의 상징인 도성은 1898년 전차가 놓이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성곽의 일부를 헐렸다고 합니다.
용산과 종로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이 철거되었죠.
그 덕에 시민들은 전차의 수혜를 입었음을 아련히 추억하실겁니다.
그러나 순종이 황제가 되자 그 해 10월 일본황태자 요시히토친황이 서울
그는 도성문을 통과하지 않았다죠.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 좌우의 성벽을 허물고 그 옆으로 비켜갔는데,
이를 시작으로 평지의 성벽은 대다수 허물어지고 오늘날 18.2km 중에서 10.5km만 남게 되었고
그 나마 청와대를 끼고 있는 인적이 드문 북쪽지역만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나요.
(무정유님의 해설을 옮겨 실음)
평지에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성곽의 모습이 낙산에 이르러야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울의 내사산(북악산-낙산-인왕산-남산)을 잇는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키로)이다.
총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공사는 주로 겨울,여름인 농한기때 진행되었다.
성벽쌓기는 전국에서 차출된 노동력이 동원되었으며 지역별로 공사구간이 정해져서
돗내기로 진행되었으며 돌에 새겨진 직제와 인명으로 보아 시공실명재를 도입하여
부실시공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웠던거 같다.
성곽은 낙산을 따라 쭉~이어지며 계절에 관계없이 덩쿨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낙산의 성곽내부에 심상치 않은 건물 몇채가 옛모습을 견지하고 있다.
자유당정권에 지어진 국민주택이라는데
일층은 온돌난방이고 이층은 일본식 다다미를 깔아 사용했다고 한다.
낙산 정상에 마로니에 공원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호젓한 공원을 지나 성곽길을 따라 걷는다.
개인적으로 세번의 성곽돌기를 하였지만 이 길이 가장 아름답다는 소견이다.
멀리 북한산의 인수봉이 보이고 북악마루가 한눈에 조망된다.
심은 이와 거두는 이 없어도 담쟁이들은 성벽의 무료함을 아는지 한껏 멋을 낸다.
과꽃이 발걸음을 잡고서 한컷 찍어달라 보챈다.
원래 홍화문이었으나 1483년에 성종이 세명의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확장할 때,
창경궁 정문을 홍화문으로 칭하여서 기존의 소문중 하나인 홍화문을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천장에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가을걷이쯤에 새들로 인해 피해가 많은지라
새를 쫒기 위한 강구책으로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혜화문을 돌아 나오면 시장관사를 만난다.
관사의 오른쪽으로 성곽길은 이어진다.
돌틈에 뿌리를 내리는 이놈들의 정체는 무얼꼬?
바람에 꽃씨 날려와 앉은 자리 탓하지 않고
생명을 움튀우는 그들의 강인함에 숙연해 진다.
성북동 이 자리는 이전에 물길이 지나는 자리였다고 한다.
따라서 마전터라고 하면 염색을 하던 건물터를 의미한다.
북악산에 접어 들었다.
저기 대궐같은 기와집이 삼청동 귀생집이라고 하던가.
흥청망청 수작거는 고관대작들의 호기어린 주정과
농익은 귀생들의 웃음소리가 예까지 들리는듯 하다.
숙청문이었다가 숙정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음기가 강해서 궁중의 여인들이 바람들까 항상 문을 잠가두었다고 하던가....
또한 창의문과 숙정문은 왕궁뒤의 북악산에 위치하고 있어 왕궁의 양쪽 팔에 해당하는지라
길을 내어 지맥을 사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풍수학자의 권유에 의해
언제부터인가 통행을 막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는 일반 민초들이 드나들 일이 거의 없는 산중이며
네 방향에 따라 요식적으로 만든 문인지라 사대문 중에 가장 규모가 작다.
촛대바위 쉼터에서 소나무 사이로 광화문과 광화문대로가 보인다.
일직선상에 놓여있지 못하고 약간 비뚤어진 것도 풍수에 의한 것일까...
멀리 북한산 보현봉의 기풍이 당당하다.
박정희 목 따러 왔다던 김신조 일당을 일망타진 했던 북악산 현장이며
우이령에서 이어지는 김신조 루트에 있는 1.21 소나무이며
바로 아래에 청와대가 위치한다.
제대로 한빵만 맞아도 황천길로 가는 허접한 인간들을 비웃는듯,
여기 이 소나무는 벌집이 되도록 맞았는데도 시퍼렇게 푸르르다.
당시 민가에서 신고를 접수한 종로경찰서장의 불신검문이 없었다면
대통령 피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 성곽길을 꼬~옥 한번은 걷고 싶었다는 황매산님을 위한 공지가 되었남요.ㅎㅎㅎ
성곽은 백사처럼 인왕산으로 구불 구불 기어간다.
누구나 왕국을 세우면 자손만대까지 부귀영화를 바랄 것이다.
태조가 1392년 개경의 수창궁에서 조선을 개국하고 곧 바로 한양천도를 실행한다.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왕궁터를 놓고 두 실세들의 파워게임이 진행된다
지금의 연세대 자리를 왕궁으로 삼자는 무학대사와
현재의 경복궁자리를 주장한 정도전과의 치열한 대립이 있었지만
정도전의 안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무인출신인 태조가 가장 먼저 추진한게 수도의 방어를 위한 성벽쌓기 였을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 1392년이고 왕궁을 짓고 2년후 천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1394년부터 겨울,여름 농한기를 틈 타, 전국에 동원령을 내려 성벽을 쌓기를 시작한다.
당시 한양의 인구가 5만이었는데 성벽쌓기에 동원된 인원이 11만 8천명이라 하니
얼마나 국가적인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세종 4년에 대대적인 보수 및 확장공사를 진행한다.
어린 백성을 가여삐 여기는 세종이 민초들에게 이러한 가혹한 짐을 지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2차 공사 역시,
상왕의 자리에 물러 앉았지만 여전히 국방과 외교권을 쥐고 있던 태조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태조때는 평지에는 토성을 쌓았고 산에는 석축을 쌓았으나 급작스레 쌓은지라 오래버티질 못하자
세종 때, 토성을 뭉개고 전구간을 돌로 다시 쌓는다.
세종때(1422)는 한양의 인구가 두배로 늘어 10만명이었으며
전국에서 인부 32만명과 기술자 2,2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숙종때(1704) 이르러 큰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견고하게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용한 돌과 축조방식만 보더라도 어느왕때 공사를 했는지 알수 있다.
워낙 막대한 재정적인 부담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대규모 공사인지라
성벽보수 공사는 절대적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왕들의 시기에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담은 액자.
딸이 다니는 상명대학.
천고마비의 계절,
감도 살을 찌우고 단맛이 배여간다.
역사에 대한 지식도 꽉꽉 채워야 하지 않겠나.
700여년 전에 쌓았던
내사산 성곽길을 걸어본다.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후
자자손손 불멸의 왕국을 꿈꾸며
성곽의 반석을 놓았어라.
세종,숙종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다시 쌓아
오백년 도읍지를 한결같이 품었건만
외세의 말발굽이 성문을 넘나들어
오욕의 역사는
힘겹게 산마루를 넘어간다.
주먹만한 호박돌과 흙으로 쌓은 성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질 못하여 다시 쌓길 수차례
덧대어 누빈 민초들의 누더기와 무엇이 다를꼬...
여기 수많은 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이동에서 돌무더기 가득 실은 달구지는
삐걱삐걱 부서질듯 위태롭고
눈알을 부아리며 거친숨을 토해내는 우마와
우마의 고삐를 잡아 끄는 장정의 고함소리.
해머를 하늘 높이 치켜들어
쩌렁쩌렁 기합소리에 바위가 쪼개지고
또닥또닥 망치소리에 모서리 각이 선다.
돗내기를 독려하는 오야지의 일갈
팔도민들의 걸죽한 사투리와
부역의 고달픔을 달래주던 노동가는
골짜기마다 메아리로 울렸으리
화강석은 그자리에 세월을 떠받치고
푸르른 이끼는 세월을 입고 있네.
가을의 전령사 인가요?
청명한 하늘과 코스모스가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창의문(자하문)이다.
'올바른 것을 드러내게 하다' 라는 의미의 彰義門,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의 혁명군이 거사를 치르는 날,
이 문을 부수고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갔으리라.
후에 그 공신들의 이름들을 현판에 새겼다고 한다.
인수봉 정상입니다.
청명한 하늘탓에 오늘 사진빨 받습니다.
작년에는 공사중이라 불편했는데 말끔히 단장했군요
.
여기 안가에서도 몇발의 총성이 들리고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았지요.
역사는 되풀이 되니 역사공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도심속에서 깊은 잠에 빠진 궁궐을 내려다 봅니다.
진준섭 님의 '궁이여' 라는 시를 감상하시죠.
묻는다.궁이여
담장밖 세상은
하늘을 찌를듯 변해 가는데
그 많던 식솔과
위엄은 어디 가고
홀로 장승처럼 서 있느냐.
묻는다.궁이여
세월에 갖혀 화석처럼 궅은 몸
켜켜이 쌓인 먼지는
눈길 하나 주는 이 없는 전설로
망각의 바람만이 스치며 지나갈 뿐,
묻는다.궁이여
긴 세월 조차 홀로 감싸 안은
잊혀졌던 구중심처 혼이
용마루 백자(白磁) 비늘로 일어서는 날,
묻는다.궁이여
마침내 역사의 지혜로운 눈을 뜨고
단청의 화려한 날개로
바람처럼 담을 넘을 용트림은
아,그대
잠자는 궁이여
찬란한 침묵의 기다림이여.
목멱산(남산)과 남산타워.
다들 행복하신가 봅니다.
역사공부 많이 하셨나요?
이리 백성의 고혈을 짜서 구축한 성곽이지만 국난에서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임란때 한양은 너무나 어이없이 함락당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줄행랑을 칩니다.
겁먹은 인조는 내사산 성곽으로는 안심이 안되었던지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을 축조합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몽고의 침입(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결국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며 군신의 주종관계를 맺게 됩니다.
선바위 라고 하네요.
기가 센 곳이라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권율장군의 집터라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는 덕을 많이 쌓았나 봅니다.
설명서의 내용대로 권율장군이 심었다면 이 은행나무의 수령이 400년이 넘는 샘이지요.
그렇지만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1000 세가 넘었다 하니 어디가서 낫살 먹었다고 까불지는 마소.
딜쿠샤.
힌두어로 '이상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3.1만세 의거를 전세계에 전한 UPI통신사 특파원인 알버트 테일러가 살던 집입니다.
그는 금광엔지니어 이면서 통신원 프리랜서를 겸했나 봅니다.
테일러가 1923년에 집을 지어 1942년 추방될 때 까지 약 20여년을 살았던 집이지요.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도왔으면 그 때문에 6개월간 옥고를 치루고
본국인 미국으로 추방당한 후,1948년에 죽습니다.
이 집은 연고를 모르고 있다가 그의 아들이 2006년에 방한하면서 세간에 알려집니다.
그의 아들은 서울명예시민증을 받았다고 하지요.
담장이 아름다운 집이라 담아 보았습니다.
정이님도 보는 눈은 있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자라목을 하고서리 볼 것 까지야....
능소화가 이쁘니 담장의 격을 한층 올려줍니다.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의 고택입니다.
말년에 여기에서 6년을 사시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후손이 사는데 단체 방문객이 미리 연락을 취하면 직접 설명을 해 준다나요.
차라리 현현하님께 듣는게 더 재미있군요 ㅋㅋ
백범 김구선생의 집무실이 있던 경교장입니다.
여기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집니다.
안두희는 백범선생의 추종자한테 칼에 찔려 죽지요.
이로서 백범선생의 암살음모에 대한 진실은
영영 역사의 미제로 남게 됩니다.
강북삼성의료원 터인데 다행히도 고 이병철회장님이 생전에
그대로 보존하라고 지시를 했다네요.
현재의 울타리는 복원작업 중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시교육청길을 내려와 대로와 만나는 지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돈의문 성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정동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곳은 지나는 건물,나무 모두가 역사의 보고입니다.
옛 왕실이나 세도가의 집에 심었다는 수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회화나무입니다.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皆下馬)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여기에서는 말에서 내려라'
한문에 해박한 무정유님의 해석입니다.
도심에서 돌담길을 만나면 너무나 기분이 좋습니다.
아스팔트위에 돌담길이 생뚱맞긴 하지만
고향의 따스한 감성이 살아 납니다.
정동교회.
담쟁이 넝쿨이 멋드러집니다.
어떤 고급 외장재가 이보다 아름아울 수 있단 말입니까.
일전에 쓴 담쟁이 란 시를 소개합니다.
*담쟁이*
담을 잘 타고 넘어 내 이름은 담쟁이
난 전생에 그림쟁이 였나 보다.
빛바랜 콘크리트 벽면을 화선지 삼아
싱그런 초록물감을 푼다.
도란도란 손잡고 성큼성큼 붓질을 한다.
질식할듯한 잿빛 벽면에 생명이 움트고
순식간에 푸르름으로 아우성친다.
초록 비늘은 햇빛에 반짝이고
초록비늘은 바람에 출렁이고
초록비늘은 빗줄기를 타고 내린다.
손에 손잡고 사방으로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 나간다.
순식간에 푸르름이 아우성을 친다.
러시아 대사관이라 하더군요
물태우 전 대통령님께서 북방정책을 펼 때,고르바초프가 방한을 합니다.
러시아가 고종에게 하사받았던 7000여평의 땅문서를 꺼내 놓고
돌려달라고 땡깡을 부렸다나요.
이미 소유권이 민간으로 넘어간 땅을 매입해서 돌려줄 수는 없으니
차관으로 달래고 얼래고 하면서
덤으로 상기 건물을 100년간 무상임대 해 줬다더군요.
한마디로 코메디같은 얘기 올시다.
현현님의 계산에 의하면 570살이나 잡수신 향나무 이십니다.
소덕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차라리 없애든지....
사람들 눈에 띄지도 얺는 이곳에 세워둔 공무원님.
월급은 꼬박 꼬박 챙겨가시지요?
나이가 드니 철밥통들이 젤루 부럽습니다.
하마가 삼킨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이 한창 막바지 작업중입니다.
금년말에 완공 되나 봅니다.
이제 남산만 오르면 오늘의 여정이 끝이 납니다.
9시간동안 걸었던 서울의 성곽돌기 입니다.
깊은샘 대장님의 해박한 역사이야기를 모두 옮길 수는 없으니
다음 기회에 꼭 참석하시어
오백년 도읍지를 돌아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산역사를 강의해 주신 깊은샘대장님.
총무의 소임을 자임한 가노라.
감성이 풍부하시어 연식 감탄사를 날리는 봄비님.
서울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시는 해설가이신 공간사랑님.
좋은 공지만 찾아 다니는 황매산님.
아직 여독도 안풀렸을텐데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무정유님.
역사에 관한 한 네이버이신 현현하님.
역사인물 중에 귀생에 관한 한 꿰고 계신 아까님.
아까님의 이웃학교에서 치마주름을 칼날같이 잡고 댜녔던 정이님.
나의 초딩친구인 순둥이 정아님.
말씀이 별루 없었지만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플러스님.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사람을 놀래키던 쏘주만님.
모두 함께해서 더욱 즐거운 역사기행이었습니다.
이리 징~하게 길게 쓴 총무후기는 첨 봤을겁니다.
그래도 인내를 가지고 즐감하신다면 보람이 있겠습니다.
남산에 오릅니다.
새로 조성된 길에 햇살을 머금은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들며 반깁니다.
총 18.2키로를 걸었지만 아직도 발걸음은 솜털처럼 가볍습니다.
누구나 가까이 있어도 가 보지 못하는 남산이지요?
매주 있는 깊은샘 대장님의 남산 야간산행에 참석해 보세요.
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지실 겁니다.
이시영 초대부통령님.
인물소개를 읽어보니 내가 잘 몰랐던 대단한 이력의 애국지사이시군요.
백범 김구선생이십니다.
제가 본 해우소 중에 가장 럭셔리한
초호화판 해우소 입니다.
함께하신 산우님들.
남산에 핀 꽃인데 이름을 몰라 올려놓았습니다.
가르켜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