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멀어진 꿈

정진숙 2013. 6. 28. 20:08

 

문우의 미술전시회가 있어 참관하게 되었다. 동호인들이 매년 개최하는 조촐한 회원전이다. 출품한 대부분의 회원이 연배가 놓은 분들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해 꾸준히 그림그리기에 정진하여 이렇게 전시회를 열만큼 실력을 쌓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하얀 벽 위에 걸린 소박한 그림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실크에 그린 세필인물화. 한지에 그린 정갈한 풍경화. 도화지에 그린 수수한 정물화. 그림을 둘러보는 동안 화가를 꿈꾸던 날들이 생각났다. 미술교육이라곤 학교 수업시간에 받은 게 전부인데 왜 그런 엉뚱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

젊은 날, 몇 해 동안 매년 열리는 국전과 미술전람회를 열심히 좇아 다니곤 했었다. 특히 후기인상파의 전시회는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르노와르의 무희, 모네의 수련,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책으로만 보던 그림들을 원본으로 만나던 때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오랜 시간을 잡지에 실린 유명 작품을 스크랩하기도 하고 캘린더의 그림을 모으기도 하며 내 나름으로 그림에 대한 갈증을 풀어 갔다. 전시회에 발길을 끊은 건 과천으로 국립미술관을 이전하고 나서부터다. 미술관을 옮기고는 서너 번을 더 찾았나 보다. 아이를 데리고 가을 국전이 열린 과천 미술관을 다녀온 게 벌써 십 수 년 전의 일이니. 사는 것에 바쁘다는 구실과 멀다는 것을 핑계 삼아 소원해지긴 했지만 실은 그림에 대한 나의 열정이 시들해졌음이 더 큰 이유였는지 모른다.

여고 1학년의 여름방학 숙제 중에 자화상 그리기가 있었다. 숙제라면 무조건 질색이던 나는 차라리 혼나고 말지 하는 심사로 방학을 보냈다. 차일피일 지나다가 개학 전날 내심 걱정이 되었던지 스케치북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울을 벽에 기대 놓고 물감을 풀어 사뭇 비장한 기분으로 붓을 들었다. 조금 어두운 색을 배경으로 칠하고 수채화 물감을 덧칠해 가며 유화 느낌이 드는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리고는 흐뭇해하며 보고 또 보고. 몇 번을 다시 봐도 대만족이었다.

개학 후 며칠이 지나 미술수업 시간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 000일어나, 하신다. 느닷없는 호명에 뭐가 잘못됐나 싶어 약간 주눅이 들어 일어났다.

"숙제 누가 대신 해 줬나" 

"아뇨, 제가 했는데요." 

"그럼 그림은 언제 배웠나."

"아니요, 그냥 그렸는데......."

잘못한 건 아니구나 하고 안도했다. 소질이 보이니 미술부에 들라며 방과 후에 미술실로 오라 하신다. 외모에서부터 화가의 포스가 흠씬 풍기는 멋쟁이 미술선생님은 화단에서 꽤 알려진 명사였다. 생각지 않은 선생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나의 귓가에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미술부 생활은 일주일 정도로 끝이 났다. 이젤이며 개인화구들을 마련할만한 가정형편이 아닌지라 부모님께는 말도 못 꺼내고 제풀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게 1학년이 지나고 다음 해 봄 경복궁에서 개교기념 사생대회가 열렸다. 경복궁 후원에 앉아 4절지 큰 도화지에 기와 담장을 배경으로 웅장하게 서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을 그렸다. 오가는 이들이 내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곤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친구들의 은근한 시샘까지 느껴져 우쭐거리는 마음도 들었다. 우리 반 미술부 아이 셋을 제치고 내 그림이 입선 하자 세 아이들의 눈총이 따가워졌다.

그해, 미술선생님은 대학교수로 가시고 화단의 신예인 다른 미술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그리고 이듬해에 열린 사생대회에서도 경복궁 향원정을 그린 나의 그림은 가작으로 뽑혔다. 복도를 오가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벽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며 마치 화가가 되기라도 한양 뿌듯했다. 무엇보다 두 분의 화가에게 그림 실력을 인정 받은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화가의 꿈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다가갈 기회가 없어 저절로 멀어지고 말았다. 내게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해 준 두 분의 소식은 그 후로 TV나 잡지를 통해 접한 게 고작이다. 간간히 전시회 소식을 전해 들으며 그림에 대한 그리움은 삭인 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잠시 지나간 시간에 맴돌던 시선을 벽에 걸린 수채화로 옮긴다. 인생 후반부를 살고 계시는 분들의 꾸밈없는 그림들이 눈앞에 있다. 뒤늦은 시작일망정 화가로서의 열정을 담아 완성한 자랑스러운 작품들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받지 못함이 무슨 상관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로 내 이름 앞에 떳떳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의 몇몇 꿈은 이루어져 그 충일감에 가슴 벅찬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리고 놓친 꿈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때론 버거워서 때론 두려워서 너무 서둘러 접었던 꿈들, 그 꿈들을 찾아 내 삶의 버킷리스트에 다시 새겨보아야겠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했다. 늦었다고 깨달은 그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또,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내 안에 이룰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존재한다고도 했다. 이미 저만치 멀어진 꿈들을 찾아 이 분들처럼 용기 있게 도전해 보자. 시작이 반이다. 저지른 것만이 내 것이라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