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숙 2013. 7. 14. 21:32

 

칠흑 같이 어두운 19번 국도의 밤 섬진강의 세찬 흐름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남부지방에 폭우가 내리고 있다는 소식은 떠나는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장마 한가운데 지리를 찾음은 무모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끝내 길을 나섰고 하늘은 우리의 그 뜻을 보듬어 주었습니다.

한밤 화개장터에 내려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대지를 흠씬 적시던 장맛비는 거짓말처럼 그쳤고 검은 구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하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전전긍긍 염려하며 준비한 산행이기에 맑은 이 하루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지리산에 깃들기 위해선 모든 감각을 리셋해야만 합니다.

귀는 지리의 경건한 음악을 듣기 위해

눈은 지리의 눈부신 장엄을 보기 위해

코는 지리의 청아한 숨결을 맡기 위해

손은 지리의 고고한 살결을 만지기 위해

마음은 지리의 비장한 모든 것을 품기 위해 열려야 합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 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중략.......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붙인 이 노래처럼 행여 견딜 만하다면 지리를 꿈꾸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가려거든 우린 많은 것을 내려놓고 겸허히 가야 합니다.

 

지난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전의 길이 역사의 명암을 되돌아보는 일정이었다면

이번 일정은 온전히 자연으로서의 지리를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7월 여름 지리의 민낯을 마주하며 한 편의 다큐를 찍고 온 느낌입니다.

삶이 만만치 않은 것처럼 산의 여름나기도 치열했습니다.

좁은 골마다 물길이 열려 위험천만하게 우리의 앞을 막았습니다.

새벽 440, 원통암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

맨발로 급류가 흐르는 개울을 건널 때의 아찔한 순간이 떠오릅니다.

돌다리를 놓아 모두의 안전을 배려하는 한 산우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좋은 걸 함께 할 때보다 고난을 함께할 때 더 큰 유대감을 갖게 됨을 경험합니다.

운무에 옷을 적시면서 몽환적인 숲길을 걸었습니다.

덕평능선에 오르며 환하게 열리던 하늘을 만난 때의 반가움과 갈증을 풀어주던 선비샘 영기어린 샘물의 서늘함을 잊지 못할 겁니다.

지리의 진면목 중 하나는 운해의 장관입니다.

칠선봉 조망터에서 그 멋진 운해를 만났습니다.

구름 사이에 둥실 떠 있는 지리의 산군들, 연하봉이 보이고 장터목산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제석봉 너머로 구름에 가린 천왕봉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가야 할 긴 오름의 끝, 영신봉도 보입니다.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영신대는 다음으로 찾기를 미루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영신봉에서 의신으로 향하는 길 또한 참으로 길었습니다.

아마 오래도록 이야기 할 것 같습니다.

참 멀고 고된 길이었다고.

기쁨보다 힘든 게 더 많은 세상살이기에 힘겨울 때면 그 긴 하산 길의 고단함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양수로 잠시 목을 축이고 대성골 골짜기를 가득 메운 우렁찬 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대성주막의 막걸리는 내려가는 길의 지루함을 넉넉히 보상해 주었습니다.

달고 맛난 산나물을 찬으로 내온 주안상의 소박함이 좋았습니다.

12시간을 넘게 걸어 큰 탈 없이 의신마을에 접어들며 흡족했습니다.

천우신조로 장마 중에 맑은 하루를 만나 무사고로 산행 마칠 수 있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의신마을 넓은 개천 우레 같은 소리로 흐르는 그 차가운 물에 아이처럼 멱을 감던 사람들.

지리의 정기 담긴 그 물살에 몸과 마음을 씻어 냈으니 올 여름 건강하게 잘 이겨낼 것같습니다.

지리산을 향해 오르는 길은 어느 길이나 순탄치 않습니다.

편안히 대하기 힘든 그 산의 역사만큼이나 지난하고 험한 길들입니다.

그럼에도 늘 꿈꾸고 그리워하게 됩니다. 

쉽지 않은 그 길을 두 발로 걸어 오르는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온전한 고통과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지리산이 품은 그 장엄함에 고통조차 기쁨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맛보고 싶어서입니다.

사람은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늘 첫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기에 문득 지리가 그리운 어느 날 우리는 또 그곳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길을 동행하게 될 반가운 이들이여!

다시 만나기를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