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 골목에서
찬바람 부는 오후 문래동 골목길을 찾았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골목 안은 의외로 포근했다. 지나간 어느 날을 기억하게 만드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삶의 흔적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골목 안에 머물고 있었다. 반듯반듯한 빌딩 숲속에 숨은 듯 남은 그 골목은 지나온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잊은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좇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은 놓치곤 한다. 무엇이 앞만 보고 내달리게 하는 걸까. 조금 더 앞서 가기 위해서?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글쎄다. 소망한 것들을 다 이루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바람과는 다르게 매사에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쩌지 못하겠다. 내가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흐른다. 이건 아닌데 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순간순간은 과거가 되어 흘러갔다.
어찌해 보지도 못한 채 떠나온 시간과 공간들. 남루한 골목길을 벗어나고파 애태우던 시간과 좁은 골목 담벼락 안의 옹색한 공간을 감추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궁핍을 이제는 추억이라 말하게 되다니 사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내가 지나왔던 골목길은 삶의 공간이자 어린 날의 즐거운 놀이터였고 또 내 열등감의 흔적이기도 하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몇 번을 뒤돌아보곤 했다. 혹시나 반 아이가 초라한 우리 집을 알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어렵기는 모두 마찬가지였을 텐데 유난히 내 처지에 민감했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추억이라 말하게 됨은 그 부끄러운 마음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이리라.
예전 철공소가 밀집해 있던 문래동 골목은 7,80년대 산업발전의 주요한 현장이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 그려진 공단지대의 빈곤한 거리가 인근 가리봉동의 자화상이던 때였다. 서울의 끝 지점 한 변두리에 불과했던 이 일대가 시내 한복판이나 다름없이 번화한 곳으로 변했다. 이 주변이 현재의 이런 풍요로운 거리로 변하리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벤처 산업단지가 생기고 최첨단의 쇼핑몰과 유명건설업체의 브랜드아파트가 들어서며 어느 동네 못지않게 번듯한 부심지가 되었다. 상전벽해란 말을 실감하는 것이 참 쉬워진 요즘이다. 90년대 들어서 광범위하게 도심화가 진행되자 공장들이 하나둘 도시 외곽으로 내몰리며 문래동의 철공업은 천천히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러기를 한참, 몇몇 작업장만 남았던 이 골목으로 최근에는 주머니 가벼운 젊은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공장이 떠난 그 자리로 저렴한 임대료에 창작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예술창작공간으로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공장지대와 예술의 조금은 이채로운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할망정 좀 더 아름답기를 바랐던 젊은 예술가들의 손길이 쇳소리 울리던 칙칙한 골목을 예술이 공존하는 장소로 거듭나게 했다.
‘문래 58번지 골목을 아시나요’는 철공소 작업현장 그대로를 일반에게 일정기간 전시공간으로 공개하는 프로젝트의 타이틀이다. 몇 해째 열리고 있는 연례행사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상을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꿈이 어느 정도 현실에 구현된 것이다. 그들의 긍정적인 바람과 움직임이 허름한 이 골목을 볼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사그라져 가던 골목에 새 숨결을 불어넣으며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힘. 별스럽지 않은 내 주변을 예술로 바꾸는 힘은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안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공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마음먹은 만큼 내가 원하는 만큼 바뀌는 거라 믿는다.
오래 전 내가 떠나온 공간을 문래동 골목에서 회상해보았다. 지나온 어느 날이 그리우면 다시 찾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을 향한 연민은 다하지 않을 갈증일지도 모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이란 제목의 글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품는 노스탤지어(그리움)는 단순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며, 마치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처럼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행위”라고 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어딘가에 머물다가 언젠가는 그리움이 된다. 그리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새로운 깨달음으로 솟아난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골목길, 어릴 적 즐거움이 묻어있고 부끄러움도 묻어있는 골목길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메말라 버석거리는 감성을 조금이라도 적셔주는 골목들이 더 많이 보존되었으면 좋으련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현재를 위로받을 수 있는 골목들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단지 나만의 것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