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문래동 골목에서

정진숙 2015. 5. 10. 20:02

찬바람 부는 오후 문래동 골목길을 찾았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골목 안은 의외로 포근했다. 지나간 어느 날을 기억하게 만드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삶의 흔적들, 낡고 오래된 것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골목 안에 머물고 있었다. 반듯반듯한 빌딩 숲속에 숨은 듯 남은 그 골목은 지나온 많은 것들을 너무 쉽게 잊은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좇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은 놓치곤 한다. 무엇이 앞만 보고 내달리게 하는 걸까. 조금 더 앞서 가기 위해서?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글쎄다. 소망한 것들을 다 이루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선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바람과는 다르게 매사에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쩌지 못하겠다. 내가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흐른다. 이건 아닌데 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순간순간은 과거가 되어 흘러갔다.

 

어찌해 보지도 못한 채 떠나온 시간과 공간들. 남루한 골목길을 벗어나고파 애태우던 시간과 좁은 골목 담벼락 안의 옹색한 공간을 감추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궁핍을 이제는 추억이라 말하게 되다니 사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내가 지나왔던 골목길은 삶의 공간이자 어린 날의 즐거운 놀이터였고 또 내 열등감의 흔적이기도 하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갈 때면 몇 번을 뒤돌아보곤 했다. 혹시나 반 아이가 초라한 우리 집을 알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어렵기는 모두 마찬가지였을 텐데 유난히 내 처지에 민감했던 모양이다. 이제라도 추억이라 말하게 됨은 그 부끄러운 마음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이리라.

 

예전 철공소가 밀집해 있던 문래동 골목은 7,80년대 산업발전의 주요한 현장이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 그려진 공단지대의 빈곤한 거리가 인근 가리봉동의 자화상이던 때였다. 서울의 끝 지점 한 변두리에 불과했던 이 일대가 시내 한복판이나 다름없이 번화한 곳으로 변했다. 이 주변이 현재의 이런 풍요로운 거리로 변하리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벤처 산업단지가 생기고 최첨단의 쇼핑몰과 유명건설업체의 브랜드아파트가 들어서며 어느 동네 못지않게 번듯한 부심지가 되었다. 상전벽해란 말을 실감하는 것이 참 쉬워진 요즘이다. 90년대 들어서 광범위하게 도심화가 진행되자 공장들이 하나둘 도시 외곽으로 내몰리며 문래동의 철공업은 천천히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러기를 한참, 몇몇 작업장만 남았던 이 골목으로 최근에는 주머니 가벼운 젊은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공장이 떠난 그 자리로 저렴한 임대료에 창작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예술창작공간으로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공장지대와 예술의 조금은 이채로운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할망정 좀 더 아름답기를 바랐던 젊은 예술가들의 손길이 쇳소리 울리던 칙칙한 골목을 예술이 공존하는 장소로 거듭나게 했다.

 

문래 58번지 골목을 아시나요는 철공소 작업현장 그대로를 일반에게 일정기간 전시공간으로 공개하는 프로젝트의 타이틀이다몇 해째 열리고 있는 연례행사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상을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꿈이 어느 정도 현실에 구현된 것이다. 그들의 긍정적인 바람과 움직임이 허름한 이 골목을 볼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사그라져 가던 골목에 새 숨결을 불어넣으며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힘. 별스럽지 않은 내 주변을 예술로 바꾸는 힘은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안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공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마음먹은 만큼 내가 원하는 만큼 바뀌는 거라 믿는다.

 

오래 전 내가 떠나온 공간을 문래동 골목에서 회상해보았다. 지나온 어느 날이 그리우면 다시 찾을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을 향한 연민은 다하지 않을 갈증일지도 모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이란 제목의 글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품는 노스탤지어(그리움)는 단순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며, 마치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처럼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행위라고 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 어딘가에 머물다가 언젠가는 그리움이 된다. 그리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새로운 깨달음으로 솟아난다.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골목길, 어릴 적 즐거움이 묻어있고 부끄러움도 묻어있는 골목길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다메말라 버석거리는 감성을 조금이라도 적셔주는 골목들이 더 많이 보존되었으면 좋으련만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현재를 위로받을 수 있는 골목들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단지 나만의 것은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