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은비령과 이순원

정진숙 2016. 5. 29. 12:00

은비령은 실제 하지 않는 가상의 지명입니다.
소설가 이순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환상 속 장소입니다.
소설 은비령은 1997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으로
2006년 이영애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은비령은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말하는 은비령은 한계령 너머 점봉산 자락의 필례를 말합니다.
울창한 숲 사이 감춰진 비밀스런 곳
이젠 제법 알려져 더 이상 비밀스럽지 않은 곳이 되었습니다.
강릉 태생인 소설가 이순원은 고향사랑이 유별스런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강원도를 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2012년 한 인터뷰에서 했던 그의 말을 인용해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처럼 정서와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지방의 한 지역을 주제로 쓰는 작가들은 많습니다. 정서와 태생이 결합되어 그만큼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것이 강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작가는 프랑스의 이야기를 보다 더 세밀하게 쓸 수 있습니다.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뉴욕의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사람의 태생적인 세계가 바로 문학세계가 되고, 자기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덧붙이자면, 서양 작가들이 자신의 태생이나 생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여기는데 한국의 작가들이 그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왜 그것만 하느냐"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로서 가장 좋은 것은 자기의 이야기, 자신의 삶의 무대를 태생적인 생각의 뿌리로 여기고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강릉 바우길은 그의 고향사랑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2007~2008년 제주도의 올레길 성공 이후
강원도를 상징하는 친근한 용어인 ‘바우’라는 이름을 붙여 강릉바우길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봄 바우길 개척대가 만들어졌으며 강릉 바우길의 한 축은 강릉이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이, 또 다른 한 축은 바우길 개척대장인 산악인 이기호가 담당하였습니다.
이순원은 강릉 곳곳을 직접 답사하며 지금의 바우길을 조성하는 것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봅니다.
“길 위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드로망'이나, '로드무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은비령'이나, '강릉 가는 옛 길',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 강원도의 바우길 같은 곳을 걷는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제 삶의 ‘길’에 관한 이야기가 작품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현재 집필중인 장편도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길은 한 인생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길과 인생은 길과 문화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길은 인생을 말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저는 ‘길’에서라야 생각이 깊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걷기는 수월하지만 내가 길을 만들며 걷긴 힘든 일입니다.
강릉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만들어진 강릉 바우길
누군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그 길을 걷다보면 누군가의 아름다운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합니다.

솔바람 부는 해솔 길을 따라 그윽한 옛 님의 향기 맡으며 걸어보시지요.
바닷길을 걸으며 동해의 가슴 탁 트이는 수평선과 만나보시지요.
길을 걸으며 나의 인생과 너의 인생을 한번 만나 보심은 어떠신지요.
그 길 위에서 더욱 깊어지는 생각들과 조우해봄은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