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의 피아골
새벽 4시, 잠결에 내다본 차창 밖으로 구례들녘이 보인다.
들판 너머 지리산은 미동도 않은 채 어둠 속에 긴 능선을 숨기고 있다.
차는 구례 화엄사 IC로 곡선을 그리며 접어들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이 길로 들어설 때면 온 신경이 달뜨곤 한다.
해마다 예닐곱 번은 찾곤 하는 구례, 이 터와 나는 어떤 인연이 있는 건지.
유목민대장님과 광주팀이 구례에서 합류하고 피아골 일정이 시작된다.
지리산 가는 길이면 의식처럼 치르는 지리산 노래 듣기
늘 들었던 같은 노래지만 언제나 예사롭지 않게 마음을 울린다.
선잠을 깨우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텐데
변함없이 음악을 들려주는 뜻은
지리산에 임하는 마음을 다잡자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성암이 있는 오산 아래
섬진강변 교각 밑에서 이른 아침을 준비한다.
새벽 식사는 늘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래도 산길은 먹은 만큼 간다는 말이 있으니
별 수 없이 열심히 챙겨 먹고 체력을 비축한다.
섬진강 길을 따라 피아골로 출발한다.
19번 국도 봄날의 벚꽃나무는 아직도 푸르르다.
가을이 한창인데 단풍은 언제 들려하는지.
직전마을 주차장 화단에 곱디 고운 다알리아가 소담스레 피었다.
꽃빛이 그렇게 맑고 투명할 수가 없다.
청정한 물과 공기로 매일 몸단장한 덕분인가 보다.
직전마을 입구에서
무착대로 가는 A팀과 피아골대피소로 가는 B팀으로 인원을 나눈다.
나는 짧은 코스 B팀에 합류한다.
피아골은 여러 해 찾아 왔었다.
언제나 계절은 가을이었다.
시월 말이거나 11월 초쯤 불 붙는 듯 화려한 단풍을 보았던 것 같다.
어느 해는 비오는 길을 걸었고 어느 해는 환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었다.
올해는 조금 이른 탓인지 단풍이 완벽하진 않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실망하지 않았던 이 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가뭄이 심했던 여름을 지나고도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지리산만의 물소리 바람소리가 느껴진다.
지리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지리산만의 깊이가 전해진다.
표고막 터를 지나 삼홍소에서 한차례 휴식을 취한다.
여유있는 일정이라 느긋하다.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사진도 찍고 간식도 먹고
마음도 편안하게 내려놓았다.
구계포교 흔들다리를 지나서 피아골대피소에 도착한다.
노고단에서 피아골로 내려오는 산객들이 보인다.
우린 넉넉하게 휴식을 취하며 피아골의 가을을 마음 속에 담는다.
내려오는 길, 연곡사엔 국화전시회가 한창이다.
진한 국화향에 취하며 피아골 산행을 마무리한다.
상경길에 찾은 황전휴게소, 지리능선을 조망하는 명소이다.
들판 너머 병방산과 오산이 보이고
섬진강 너머로 지리의 유장한 능선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뭔가 뭉클한 것이 스치고 지나간다.
지리산의 긴 능선들은 가슴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저 능선길 위로 지나갔던 시간들, 함께했던 얼굴들, 그리운 마음들
세월 가도 잊혀지지 않는 그 무엇들이 그 산길 위엔 있다.
그 모두를 그대로 남기고 서울로 향한다.
어느 날엔가 다시 찾을 그리운 길을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