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봉정암 가는 길

정진숙 2010. 9. 6. 20:08

 

 

 

 

 

 

 

 

 

 

 

 

 

 

 

 

 

                 

세상을 제 아무리 배우고 익힌다 한들 남을 배려하고 헤아릴 여유가 없다면 그 많은 배움은 다 무용한 일이다. 내가 그런 괴물이었다. 내 쓰라림만 껴안았지 타인에 대한 이해는 외면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왜 아무 것도 쳐다보려 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삶에서 불필요한 시간이란 없다. 허무맹랑한 그 순간도 갑갑하던 나를 숨 쉬게 하고 조금은 철들게도 하는 필요한 시간들이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의미의 실패란 그래서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깨달음을 꼭 남겨준다.

한계령 입구 용대리에서 백담사로 향한다. 백담사 너른 계곡에는 세월의 물길에 씻긴 바위가 말갛게 누워있다. 그 흰 바위 위로 가지런하게 올린 돌탑들이 있다. 누구의 소원이 저리 높이 쌓인 걸까. 어쩌면 소원이라 이르는 속세의 욕심이 쌓인 건지도 모르겠다.

영시암에 이르러 점심공양을 하고 숲길을 다시 걷는다. 설악의 대청봉 아래 하늘과 맞닿은 첫 암자,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다. 저 마다의 고뇌를 지고 말없이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탁발승의 수행인양 험한 이 길을 모두 묵묵히 걷고 있다. 숨이 턱에 차서 헉헉대며 설악의 영봉을 굽어볼 즈음 봉정암에 이른다. 발아래 용아장성의 칼날 같은 능선이 내려다보인다. 내가 사는 삶도 저리 깎아지른 벼랑 끝이었던가. 산봉우리에 올라서자 작아지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산 깊은 이 암자에 무수한 중생이 찾아든다. 그 힘겨운 산길을 올라와 밤 새워 불공을 올리는 저 많은 이들은 무슨 간절함을 바라고 있을까. 나는 또 어떤 기대를 안고 이곳에 왔을까. 봉정암 방사에는 헤아리지 못할 기원들이 가득하다. 발조차 제대로 뻗지 못하는 세 뼘 좁은 자리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엔 대청봉에 오른다. 어느 한 때 인생의 큰 산 앞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또 한 단계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 한걸음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 만사가 누구의 탓도 아닌 나로 인해 벌어지는 일 아니던가. 남을 미워할 이유도 원망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 안에 이는 울분은 잦아들지 않는다. 미움도 원망도 떠나보내야만 한다. 나를 막아서는 모든 걸림돌에 감사하자.

낮 동안의 긴 번잡은 수렴동 물길에 말끔히 씻어 버리고 이 밤 설악의 적막을 마주한다. 어둠 속에서 소청산장의 청명한 불빛이 시리도록 밝다. 붉은 일몰 사라진 검은 능선 위로 그믐 녘 칠흑 하늘에서 별이 빛난다. 사리탑 언덕 서늘한 바람은 세상사 참 보잘 것 없더이다 하며 내 곁을 스치고 있다. 지금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없다. 별과 바람과 어둠을 응시하는 현재만 있을 뿐이다. 오로지 고요만 충만할 뿐이다.

봉정암으로 오르는 길은 나와 마주하는 순례의 길이다. 순례의 길은 그 길을 걷는 것이 그대로 수행이다. 수행의 그 길을 걷고자함은 정직하게 나와 마주하고 싶어서다. 구부러지고 휘어진 내 마음의 굴곡을 반듯하게 펼치고 싶어서다.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며 숨이 턱까지 차올라 아무 생각이 없어지면 세상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무심결에 맞는 바람 한줄기가 감사하다. 저 산이 나를 다시 내려가라 해도 두려워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워낸 후에야 편안히 채울 수 있다던가. 미망과 억지를 버리고 차곡차곡 순리대로 또 채워 가리라.



 


 

저 마다의 고뇌를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설악의 대청봉 아래 하늘과 맞닿은 곳에 첫 암자..봉정암

 

세상을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남을 배려하고 헤아릴 여유가 없다면 그 많은 지식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내가 그런 괴물이었다.

내 쓰라림만 껴안았지 타인에 대한 이해는 외면하고 있었다.

왜 아무 것도 쳐다보려 하지 않았는지. 

하지만 삶에서 불필요한 순간이란 없다.

그토록 허무맹랑한 시간도 갑갑하던 나를 숨쉬게 했고 조금은 철들게 했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의미의 실패란 그래서 없는 것이다.

봉정암 방사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엔 대청봉에 오른다.

인생의 걸림돌에서 한 때 머뭇거렸다.

또 한단계 문턱을 넘어섰다.

한계령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면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낮 동안의 번잡함은 수렴동 물길따라 사라지고

설악의 적막 속에 소청의 불빛이 시리도록 청명하다.

검은 능선 위로 기우는 붉은 일몰이 마음을 적시고

그믐녁 깜깜한 하늘 위에 별빛이 눈부시다.

사리탑 언덕 서늘한 바람은

세상사 참 보잘 것 없더이다 하며 내 곁을 스친다.

지금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별과 바람과 어둠을 응시하는 현재만 있을 뿐.

오로지 고요만 가득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