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압록강은 흐른다

정진숙 2017. 1. 24. 19:41

‘압록강은 흐른다’

이 소설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의 기억은 아득한 시절로 돌아간다.

한참을 내 곁에서 머물렀던 소설이다.

까마득히 오래 전 읽었던 그 책은 가끔씩 나를 옥죄이곤 했었다.

마치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히던 학창시절 아쉬운 기억처럼.

 

여고 1학년, 꿈에 부풀어 첫 학기를 시작했다.

종로 2가에서 내려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서 안국동과 견지동 사이 횡단보도를 건넌다.

3월 이른 봄 날씨는 알싸하고 매웠다.

새로 맞춘 교복은 어색했고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칼라는 불편했다.

중동고 남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골목을 지나

수송동 70번지의 여학교 교문을 들어선다.

도심 안 메마른 풍경의 교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꿈꾸던 여학교와는 너무도 다른 그림.

낡은 벽돌 건물 한 채와 회색 콘크리트의 밋밋한 교사 두 채

휑한 운동장 너머의 교정은 참 허술해 보였다.

교실에서 만난 연로한 담임선생님의 힘없는 목소리는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첫 등교였는데 무엇 하나 만족스러운 게 없었다.

왠지 즐거울 일이라곤 없을 것 같은 불안감

한동안 나의 느낌은 적중했던 것 같다.

매 수업마다 들어오시는 학과목선생님들은 모두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어디 한구석 생기라곤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봄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도서반 활동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넓은 도서관을 번갈아가며 당번을 서는 게 좋았다.

누렇게 변색된 책일망정 좋아하는 책들을 원 없이 만지고 볼 수 있었으니

충분히 가슴 뛸만한 일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날 무렵이던가.

사서선생님이 도서반 아이들에게 책을 지정해서 읽게 하셨다.

그때 정해주신 첫 번째 책이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아마 그 분은 우리 모두를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 책 서두 부분을 몇 페이지 읽다가 덮고 말았다.

끝내 다 읽지 못했다.

읽은 부분의 내용조차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정작 그 소설의 진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재독작가인 이미륵이 쓴 독일어 소설이란 것과

전혜린의 번역으로 한국에 알려지게 된 책이란 것까지.

 

그 소설은 1959년 처음 번역되어 알려지기 시작한 책이었다.

1970년대에 중판이 나올 만큼 많이 읽히기도 한 작품이다.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명작으로 인정받는 소설이다.

1946년 발표 당시 독일에서도 많은 찬사를 받았던

예술성 짙은 작품임에 분명한 그 소설이 왜 잘 읽히지 않았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숙제처럼 읽어야 하는 것에 대한 괜한 반항심일 수도 있겠고

그 나이 또래의 감성과 잘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우리 중 누구도 선생님의 의도대로 따른 아이는 없었다.

그저 제 멋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말랑말랑한 내용의 책들을 읽곤 했다.

지금껏 기억에 남은 책은 별로 없는 걸로 보아 쓸데없이 시간만 허송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희한한 건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 ‘압록강은 흐른다’가 아직껏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끝내지 못한 숙제로 맘 한구석에 계속 자리하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

어쩌면 몇 페이지 읽는 동안 각인된 어떤 정서가 나를 꽉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잊힐 만 하면 생각나는 이미륵 그 소설

이야기 속의 압록강이 아직 내 마음 안에서 흐르고 있는 건 아닌지.

 

작은 실마리 하나가 지나간 시간들을 내 앞에 풀어놓는다.

이미륵이 상실감으로 고향 압록강을 떠올리듯 나의 여고시절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메마른 풍경의 여학교는 졸업하던 해를 마지막으로 종로에서 도곡동으로 옮겨갔다.

짧은 3년 즐거운 추억보단 우울함이 더 많았던 시절.

성장통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아픔들이 늘 주변을 맴돌았다.

결코 그리움으로만 돌아봐지지 않는 날들이다.

그럼에도 가끔 돌아보게 되는 건 그 귀한 날들을 허투루 보낸 아쉬움 탓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