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을 다듬으며
설을 쇠고 며칠이 지났다.
명절에 쓰고 남은 콩나물을 베란다에 두고는 깜빡 잊고 있었다. 비닐봉지 안을 들춰 보니 아직 성한 게 남은 것 같아 다듬기 시작했다.
뿌리를 한참 다듬고 있자니 한낱 콩나물일망정 생명이란 참 중하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싱싱할 땐 오동통하고 미끈하던 것이 물 한 방울 못 삼키고 몇 날을 버티느라 가느다랗게 잔뿌리를 뻗어 내렸다. 살고자 하는 생물의 본성이 애틋함으로 전해진다. 그전 같으면 손질하기 번거로워 버렸으련만 함부로 하기가 짠해져 쓸 만한 것을 하나라도 더 골라내려고 찬찬히 살핀다. 생존을 향한 식물의 본성이 늘 일에 치어 사신 우리 어머니의 강인한 생활력에도 닿아 보인다.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한 지붕 아래 서너 가구씩 함께 세를 살던 시절, 옆방 아주머니가 평상에 앉아 분홍색 바가지에 담긴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마당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게 같이 하자 청하기에 돕게 되었다. 서툰 손놀림으로 잔뿌리를 정리하다가 무슨 까닭에선지 사는 게 뭔가 하는 아이답지 않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해거름에 식구들 밥상 차리는 일에 열심인 그 아주머니를 보며 괜스레 내 모습이 겹쳐져 슬퍼졌다.
어머니는 맏딸인 나에게 노상 자잘한 집안일을 거들게 하셨다. 이왕 하는 일 기쁜 마음으로 도와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번번이 고되게만 여겼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지레한 집안일이나 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쩌나 걱정까지 했었다.
그땐 어머니들의 할 일이 왜 그리 많았는지. 해도 해도 표 나지 않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가사 일이다. 어린 내 눈엔 그게 마뜩치 않았다. 나도 저리 살게 되나 겁이 났다. 빨래라도 거드는 날엔, 오죽하면 빨래하기 싫어서 시집도 안 갈 거라며 어머니께 정색을 하고 볼멘소리를 했을까. 물론 그때의 느낌이 남아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식재료나 시간소모가 많은 가사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히 세탁기가 나오는 바람에 빨래가 싫어 결혼 안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이젠 알게 되었다.
지금이라고 주부의 일이 녹녹한 건 아니지만 삶의 많은 방식이 예전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졌다. 누대로 이어온 가족을 위한 어머니들의 오랜 인고와 시간의 희생 덕분에 요즘 세대의 여자들은 유래 없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산다. 고맙게도 멋모르고 걱정만 했던 가사의 구속을 구속으로 여길 필요도 없을 만큼 여러 모로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달라진 건 겉으로 보이는 외양뿐만이 아니다. 가족을 위하는 모성의 근본이야 변할 리 있으랴만 정의 깊이가 분명 달라졌다. 엉덩이 붙일 짬도 없이 동분서주 자식을 거두던 어머니의 살가운 정. 빠듯한 생계를 위해 삯바느질로 밤새우던 어머니의 근면함. 언제나 가족의 안녕이 먼저인 애틋한 그 사랑의 모습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지. 아마 내게 그리 살라면 줄행랑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희생 없는 사랑이 있을까. 내 한 몸이 우선이라면 가사에 쏟는 고단함이 기껍지 않고 성가실 것이다. 애정이 있어야 정성을 쏟고 공을 들인다. 새삼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의 시간이 떠오른다. 그 고된 세월을 가족 사랑의 큰마음으로 달게 견디셨으리라. 나의 수고로움에 식솔들 모두가 편안해질 것이라 여기셨기에 모든 고생을 보람이라 믿으며 이겨내셨으리라.
다 시든 콩나물을 다듬으며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에 비해 너무 나 편하자고 살림살이를 대충하지 않았나 돌아본다. 바쁜 일상을 핑계 삼은 간편함의 추구가 식구들을 향한 정성의 크기를 줄게 한 건 아닌지. 빠르고 손쉬운 생활을 추구하는 동안 사람 사이의 정마저도 행여 인스턴트로 변하게 만든 건 아닌지.
눈 뜨고 나면 바뀌는 세상이다. 옛 것이 아무리 아쉬워도 되돌아가긴 불가능하다. 변화에 맞춰 사는 게 옳은 일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모습이야 시절 따라 변하더라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따뜻한 정만은 메마르지 않게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저녁준비를 서둘러 마치고 설에 뵌 어머니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엄마, 고맙습니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