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정진숙 2017. 2. 7. 16:43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집을 찾아 동네서점에 들렀다. 내가 찾던 책은 없었고 그때 막 떠오른 책이 이미륵의 소설이다. 압록강은 흐른다, 숙제처럼 마음 한자리에 늘 남아있던 제목의 책이다. 마침 한 권이 있어 구입하고 서점을 나왔다.

 

“수암 - 이것은 나와 함께 자라난 내 사촌 형의 이름이다.”

압록강은 흐른다, 의 첫 문장이다. 단 한 줄의 이 문장은 40년 전 첫 장을 읽던 날의 느낌을 다시 불러왔다. 갈색 표지의 낡은 책,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넘기며 심드렁했던 그날의 정서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 막 여고 시절을 시작하던 1학년 첫 학기에 처음 읽는 소설치곤 너무 칙칙하고 고루했다. 사서선생님은 허구 많은 책 중 왜 하필 이걸 읽으라는 숙제를 내신 건지. 불만만 가득해서 도무지 읽기에 속도가 붙질 않았다. 겨우 몇 페이지 들척이다 손을 놓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 소설이 계속 떠나지 않고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게 가끔은 신기했다. 이유가 무언지는 알 수 없었다. 새로 구입한 책을 읽으며 조금씩 내 마음이 지나온 길을 엿보게 된다.

 

소설은 도입부부터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떠나온 고국,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해주의 추억들이 한 글자 한 글자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다섯 살 수암과의 만남부터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도주하던 때의 악몽과 혈혈단신 낯선 유럽으로 유학 오게 된 이야기까지. 소설은 이미륵의 일대기를 그린 자서전에 가깝다.

 

미륵은 해주의 풍경들을 아련히 회상하고 있다. 중문 안 안뜰에서의 살가운 이야기며 사랑채 밖 샘뜰에서의 흥겨웠던 놀이들,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자애로운 눈길까지 애틋하게 재현해낸다. 그의 어린 날 추억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글을 쓰는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움에 사무쳤을까. 이역만리 독일에서 그리는 고향의 풍경, 허물어져가는 성벽과 부서진 남문, 일제 치하에서 하루하루 달라져 가던 해주 시가지의 쇠락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오백년 왕조의 몰락을 몸으로 겪어낸 그때의 기억이 때론 두려웠을 것이다.

 

경성의대 재학 시절 3.1운동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미륵은 어머니의 강권으로 어릴 적 그려보던 유럽 유학길에 오른다. 외아들을 먼 타국에 보내서라도 안전하길 바랐던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압록강을 건너 고국산천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미륵의 마음은 또 얼마나 비통했을까.

 

독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을 기다리던 상해에서의 1년간의 막막함을 뒤로하고 거선을 타고 유럽으로 가는 긴 여정이 소설 후반부엔 그려진다. 양자강어귀에서 출항한 배는 남지나해를 거쳐 사이공, 싱가포르, 실론을 경유한다. 달빛 밝은 인도양을 지나서 시나이산이 보이는 홍해를 지나고, 모래언덕 사이 좁은 수에즈운하를 빠져나와 폭풍우 치는 지중해의 밤을 견뎌내고 드디어 마르세이유항에 입항한다. 2,000명이 넘는 극동사람을 실은 큰 여객선을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힘겹게 첫 발을 내딛는 유럽 땅, 미륵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맏누님으로부터 전해온 먼 고향에서의 첫 소식이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 는 이렇게 대장정의 끝을 맺었다.

 

독일어로 소설을 발간하고 난 5년 후, 1950년 미륵은 위암으로 5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후 독일의 첫 출판물이라는 기록을 세운 이 책은 문단의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 아름다운 서정문으로 동양의 정서와 풍경을 잔잔하게 그려낸 그의 문체는 독일어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독일의 몇몇 주에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이 작품을 발췌해 실었다고 한다. 유학시절의 일들도 2편으로 엮었다는 설이 있다. 안타깝게 원고를 찾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독일에서의 그런 성공이 있기까지 그가 겪었을 지난한 과정들이 애달프게 그려진다. 몰락한 나라의 백성이 견뎌내야 했던 원치 않은 이별과 아픔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한 시대가 열리던 날의 혼돈들. 유약한 소년이 지나온 성장의 날들이 짧은 소설 속에 꽉 채워져 있다.

 

아마 그 옛날의 나는 그가 지나온 고행의 과정들을 들쳐보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인 회피심리가 책읽기를 멈추게 한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심결에 각인된 어떤 정서가 내 의식의 한 부분을 오래도록 붙들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젠 담담히 마주하며 책장을 모두 넘겼다.

너무도 맑고 유려한 문장들이 수채화로 된 서사시 한편을 감상하고 난 느낌을 준다. 이미륵이 그려낸 100년 전의 조선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부활했다.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던 이미륵의 간절함이 그가 살았던 그때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