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함백산의 추억
겨울 함백산으로 가고 있다. 며칠 전 정동진 가는 길에 중앙선 기차를 타고 이 고장들을 스쳐 지났다. 그저 바라만 보았던 그때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산 중턱에 놓인 철길 위에서 내려다보던 예미, 사북, 고한, 태백, 내겐 몹시 낯설기만한 산간마을들은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우릴 태운 대형버스는 좁은 협곡을 돌고돌아 가파르게 휘어진 도로를 어렵사리 올라서 만항재에 도착했다.
천 삼백 고지의 만항재에는 드문드문 흰 눈이 쌓여 있었다. 겨우내 보기 힘들던 눈을 예서 실컷 보려나 했더니 이곳 역시 신통치 않다. 기후가 달라져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고갯길 만항재는 봄 여름이면 야생화 천국으로 변하는 곳이다. 겨울철 눈 산행지로도 사랑받는 함백산. 완만한 만항재 들머리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바로 이웃한 태백산 보다 수더분한 함백산이 나는 더 좋다. 파란 겨울 하늘아래 퉁명스레 서있는 함백산의 밋밋한 정상부가 왼편으로 조망된다. 돌탑 아래 보이는 방송국 송신탑이 다소 괴기스럽다. 마치 외계의 어느 별로 비밀스런 무언가를 송신하는 미심쩍은 구조물처럼.
송신탑을 보는 순간 아주 오래 전 무박으로 걸었던 백두대간 길의 고단함이 떠올랐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들던 날이다. 일행은 직장산악회 동료 넷과 나, 다섯 명이었다. 이번과는 반대 지점인 두문동재에서 출발해 만항재로 넘어오는 구간이었다. 쌓인 눈 때문에 등산로는 흐려졌고 갈 길은 멀어 서서히 지쳐갈 무렵 송신탑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것이다. 그제야 살았구나 싶었다. 고통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 모양이다. 함백산이란 이름 뒤엔 늘 그날의 고생스럽던 기억이 따라붙는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엔 너무나 편안한 산행이다. 눈도 많지 않고 길도 멀지 않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날씨도 포근하다. 정상 바로 아래 깔딱 고개가 조금 버거울 뿐 만사 순조로웠다. 양지 녘에서 먹은 점심도 맛났고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태백산, 매봉산의 미끈한 산 너울도 멋졌다.
그러나 함백산 정상석이 있는 곳을 향해 오르는 동안 모든 게 달라졌다. 새파란 대기 어디에 그런 칼바람이 숨어있었던 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지독한 바람이 불었다. 발걸음을 휘청거릴 만큼 거센 칼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혼비백산해서 사진도 찍는 둥 마는 둥 후다닥 하산을 서둘렀다. 아이젠을 간신히 끼우고 가파른 길을 엉거주춤 내려와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인 주목군락 고사목이 보이는 지점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다. 매운바람에 한바탕 세게 얻어맞고 나니 전신이 얼얼하다. 그런데도 무언가 상쾌해진 이 기분.
그러고 보니 고생스러웠던 함백산을 다시 오르고 싶었던 건 지독한 이 겨울바람이 그리웠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멍해지도록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강력한 바람, 겨울이 다 가기 전 화끈한 칼바람을 한번쯤은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함백까지는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길을 걷는다. 화방재에서 출발한 1코스 산우들과도 반가이 조우했다. 오후 늦게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맞는지 먼 하늘이 차츰 흐려지고 있다. 은대봉으로 가는 일정을 줄여 적조암 길로 짧은 하산코스를 잡는다.
종일 맑았던 대기덕분에 깡마른 속살이 훤히 드러난 겨울 태백산맥의 시원스런 조망을 제대로 만끽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달려 차를 타고 올라와도 금세 시야가 탁 트이는 매력적인 산, 바람 매서웠던 함백산에서 짜릿한 하루를 보내며 올 겨울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