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1
고향의 봄을 생각하면 흙먼지 자욱한 황토 길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꼬지지한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걷는 너덧 살배기 상고머리 여자 아이도 아른댄다. 아득한 기억 너머에서 만나는 유년의 첫 장면이다.
집 앞 오른쪽 길로 오르면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어느 대보름날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그 언덕에 올랐다. 둥실 떠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라고 하셨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게 멋쩍고 이상해서 난 안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래도 맘속으론 무언가를 바라며 웅얼거린 듯하다.
대문을 나와 왼쪽 길로 조금 내려가면 공동 우물이 있었다. 양쪽에 물동이를 매단 지게로 물을 길어 장독에 담아두고 식수로 사용했다. 비오는 날이면 귀한 우물물을 대신해 초가집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아 빨래를 한다. 질척한 흙길의 물웅덩이를 요리조리 피해서 간신히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큼지막한 다라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빨고 계셨다. 그런 날이면 비릿한 빗물냄새를 맡으며 고사리 손으로 엄마의 부족한 일손을 돕는답시고 빨랫감을 조물락거렸다.
우물 앞을 지나 동구 밖으로 나서면 넓은 신작로가 나왔다. 새로 닦은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관공서도 몇 지나고 시장도 지난다. 내가 입학한 서부초등학교가 근처에 있었다. 1학년 한학기 겨우 반년 남짓 다녔던 학교다. 몇몇 각인된 추억들 덕분에 짙은 그리움으로 남은 나의 첫 학교. 한쪽 가슴에 핀으로 고정한 수건과 노란이름표를 달고 입학식 하러 가는 길에 옆집 아이와 동산에서 놀다 지각한 웃지 못할 일도 있다. 동생들 건사하느라 늦게 출발한 엄마는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 나를 찾느라 이반 저반 기웃대며 혼비백산하셨다. 뒤늦게 도착해서 선생님과 엄마에게 첫날부터 호되게 야단맞던 기억, 부끄러운 지각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된 모양이다. 하교 길 학교 담장 옆 좌판에서 팔던 대구명물 납작 만두가 가끔씩 생각난다. 고소한 기름내 풍기며 후각을 자극하던 먹을거리에 꼴깍꼴깍 침을 삼키곤 했었다. 동전 한 푼 없었으니 쪼그리고 앉아 군침만 삼키다가 집으로 갔다.
서울로 이사했던 5학년 2학기 때까지 부산으로 오가며 전학 다닌 서너 해를 제하고 나면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은 불과 9년이다. 그럼에도 내 삶의 대체적인 모든 건 태생지인 대구에서 굳어졌다. 다소 보수적이고 완고한 경상도 특유의 기질이 때론 답답해 바꿔보려 애썼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여지없이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대구사람. 한 인격 안엔 개개의 경험에 덧붙여 가족을 포함한 조상의 내력도 담겼으니 당연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몫이다.
고향 대구를 떠나온 지 40여년이 넘었다. 큰댁의 대소사에나 가끔씩 다녀온 손꼽을 정도의 방문을 제외하면 따로 가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또 대구에 간다는 건 큰집에 간다는 의미였지 대구라는 도시에 가는 건 아니기도 했다. 그렇듯 어정쩡해진 고향 대구에서 문인협회 주관 행사가 열린다. 처음엔 무덤덤했다가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무렵의 대구는 이미 사라졌기에 고향으로서의 의미는 약해진 도시다. 나의 살던 고향이며 이제는 낯선 도시, 대구를 대하는 심정은 복잡했다. 새 옷도 사고 새 신도 사며 몇 날 동안 마음을 다독였던 것 같다.
2
봄꽃 만발한 경부고속도로, 떠나온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간다. 이 길을 지날 때면 눈으로 마음으로 찾곤 하는 장소가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리, 아버지의 본적지다. 하행선 왜관을 지나고 얼마 후면 고속도로 너머 왼편으로 그 마을이 멀찌감치 보인다. 경부선 신동역에서 기차를 내려 먹골 까지, 철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언덕으로 올라서면 아버지의 누님이 사셨던 마을이 나온다. 어느 해에 큰 도로가 새로 뚫린다는 얘기가 들렸고 어느 해는 마을 뒷산을 휘돌아 들판 앞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서울로 이사 오던 해 여름방학에 먹골 고모 댁에 인사차 다니러 갔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보면 고모님 내외와 사촌 오빠들은 새벽같이 들일을 나가고 안계셨다. 나 혼자 대청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바라보았던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마당 가득 내리쬐던 한여름 뙤약볕, 뒷동산의 키 큰 소나무들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이제는 보고파도 볼 수 없는 그리운 정경들. 오래 전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사촌들은 모두 외지에 있어 고모네 집은 결국 팔리고 말았다. 내 놀던 옛 동산은 그렇게 또 사라지고 추억만 아련히 남았다. 그때의 마을이 아직 남은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간다.
버스는 서대구 IC로 접어들었다. 익숙한 이름의 길들을 스쳐 지나며 온갖 옛일들이 앞 다투어 떠오른다. 내당동, 평리동, 비산동, 남산동. 유년의 오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던 동네들이다. 그러나 이름만 남고 풍경은 모두 사라진 그곳은 이미 낯선 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시가지는 서울 여느 동네와 비슷하다. 다른 게 있다면 조금 앞서간 계절감이다. 벚꽃은 지고 신록 무성해진 가로수, 계절은 봄이 아닌 초여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계명네거리를 지나며 남산동에 살던 때가 또렷이 그려진다. 서문시장까지 엄마 심부름 가던 길이며 큰집으로 할머니 뵈러 가던 길. 그나마 구도심 안엔 예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사방으로 눈길을 보내며 두리번거린다. 아뿔싸, 그 사이 버스는 근대문화골목을 스쳐지나 대구문학관으로 가고 있다. 청라언덕이며 3. 1운동길, 이상화고택, 계산성당을 꼭 보고 싶었는데 행사일정상 시간이 여의치 않단다. 차라리 문학관을 생략하고 근대골목으로 갔으면 좋았을 걸 하며 안타까워한다. 다행히 그런 아쉬움은 잠시 후에 싹 가시게 되었다.
향촌문화관을 겸한 대구문학관은 기대이상으로 흡족했다. 전쟁 후 피난 온 문인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향촌동의 문학사적 의의와 대구의 옛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둔 뜻 깊은 공간이었다. 사진과 그림으로 만나는 반가운 옛 풍경 앞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내내 아릿하던 마음을 잠시나마 달랬다.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 공식 행사를 모두 마치고 제법 늦은 밤 김광석 거리를 둘러보았다.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이 골목도 여전히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떠나간 모든 건 어쩔 수 없이 그리워하게 되나보다.
다음 날의 일정은 달성군의 인흥마을과 마비정 벽화마을, 낙동강변 사문진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문협 관계자가 나눠준 이틀간의 일정표는 대구의 과거 돌아보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대구의 오늘을 보여주기보다 대구의 어제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커 보였다.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현재가 중요하겠지만 그 도시를 고향으로 그리워하는 나에겐 과거 돌아보기가 더 유의미하고 반가웠다. 비록 여행자의 눈으로 고향을 바라본다는 미안함이 있어도 이번 여정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현지 인솔자의 말로는 주변 유적지와 자연환경을 정비하고 개발한 건 최근이라고 한다. 늦게나마 천만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미래관은 과거의 지식으로 결정된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고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구성 요소다. 기억이 빈약하면 이전에 가본 곳 말고는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상상할 수 없다."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서 따온 문장이다. 이 글이 말하는 대로라면 살아온 날의 기억은 오늘 뿐 아니라 내일의 삶에도 기여한다.
나의 살던 고향 대구, 언제 돌아보아도 따사로운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내 삶의 자양분을 넉넉히 나눠 받은 고향은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기억 속 그곳에서 꿈꾸던 내일을 나는 오늘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지금의 기억들이 어느 미래의 가능성으로 열리길 꿈꾸고 있지 않은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설렘으로 달려온 그 길을 그리움 담아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