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간의 지리산 종주기 2
<2일차; 연하천대피소에서 세석대피소까지 9,9키로>
잠결에 일어나 작은 창으로 대피소 밖을 몇 번이나 내다보았다. 어제 밤 흐린 하늘 탓에 보지 못했던 별들을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해서다. 번번이 실망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서너 시쯤 되었을까. 아예 문밖으로 나와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구름이 자욱하다.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싶어 마음을 접고 푸른 지리산의 공기를 한껏 들이키고는 대피소로 들어갔다.
이른 시각 서둘러 산행을 시작하는 이들의 부산함이 연하천의 새벽을 깨운다. 어제 같아선 깨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거뜬하게 하루를 열었다.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여유 있게 다음 목적지인 세석대피소를 향해 출발한다. 9,9키로 거리는 짧은 코스지만 고도차가 제법 있어 형제봉,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모두 만만치 않은 구간이다.
중간 중간 조망이 터지는 곳에 서서 구름 사이로 너울진 산그리매를 바라보며 지리산의 웅장함에 빠져든다. 지쳐 기운이 다할 즈음 문득 고개 들면 바라보이는 산 너울은 한 모금의 샘물처럼 청량함을 선사해준다. 힘들어도 이 큰 산을 오르는 건 바로 이런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광 때문이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이른 점심을 먹는다. 데운 햇반에 인스턴트짜장과 단무지,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음식들인데 푸르름 짙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먹는 맛이 꿀맛이다.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기며 느긋하게 벽소령의 오후를 만끽한다. 아침에 연하천대피소에서 만난 몇몇 분들을 세석 가는 길에 또 만났다. 중학생 아들을 대동하고 종주에 나선 부부. 딸을 데리고 나선 엄마. 전주에 사는 젊은 부부. 서울 목동에서 온 중년 부부. 동행한 대부분이 휴가를 맞아 지리산종주에 도전한 가족들이다. 모두 자신들만의 의미 있는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의신마을로 가는 이정표 앞에서 남편이 젊은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슨 얘길 했냐고 물었더니 중간에 하산하려는 부부를 말렸다는 것이다. 막상 종주를 시작하고 보니 너무 힘들었던지 내일 비소식도 있고 해서 겁이 난 모양이다. 이왕 나선 길인데 끝까지 가보는 게 좋지 않겠냐며 비는 내일 돼봐야 알 수 있으니까 미리 걱정 말라고 거들었다. 앞으로 갈 길은 지나온 길보다 훨씬 편한 길이라고 살짝 뻥도 쳤다. 조언 감사하다며 어찌할지 몰라 망설이는 부부에게 먼저 갈 테니 무조건 오시라며 우린 앞서 걸어갔다.
앞만 보고 묵묵히 걷다가도 수시로 뒤돌아보았다. 젊은 부부와 아들을 동행한 가족이 언제나 따라오나 하고서. 세 식구가 함께 온 가족은 아들과 엄마의 체구가 상당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땀날 것 같은 몸으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산길을 걸으려니 죽을 맛일 거다. 농담 반 진담 반, 우린 시속 1키로라서 세석엔 늦은 밤이나 도착할 거라며 엄마가 유쾌하게 웃는다. 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라고 별 차이 없지만 만난 사람들 모두가 산행초보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용감무쌍하게 지리산종주에 나선 이유는 무얼까.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또 하나 나타나고, 가도 가도 가야할 거리는 그대로인 느낌이다. 불현듯 종주 길을 걸어 정상까지 간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매일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고 지루한 길을 끝도 없이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정상이다. 그러나 살아감의 목표가 과정 그대로에 있듯 꼭 정상에 닿는 것만이 목표는 아닐 것이다. 한 지점 한 지점 내가 지나온 그 발걸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정상에 오르기란 불가능하다. 힘들지만 멈추지 않고 걸어야 비로소 정상을 밟게 된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매순간의 무게를 견뎌내야 끝을 볼 수 있다. 되돌아가기를 바라던 그때, 용기를 내어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그 부부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는 것만이 목표인 순간이 있다.
헝제봉, 덕평봉을 지나왔다. 선비샘에서 목을 축이고 긴 능선을 걷고 걸어 칠선봉, 영신봉을 넘어섰다. 지리산 최고의 조망지인 세석평전을 눈앞에 두고 마음 뿌듯하다. 사실 제일 힘든 날은 첫날이다. 그새 몸이 적응했는지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수월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은 길이 펼쳐지리란 위로를 주문처럼 외며 세석대피소로 들어섰다.
좋은 자리는 먼저 온 이들이 다 차지하고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저녁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연하천에서 미리 출발한 목동 부부가 옆 자리에 합석해도 괜찮으니 앉으라고 한다. 목재테이블에 코펠이며 버너를 올려놓고 찌개를 끓여 밥을 먹는다. 두 사람의 배낭이 작아 보여 어떻게 종주를 하게 되었냐고 말을 건넸다. 한 번 해볼까 싶어 시작한 건데 생각보다 어렵다는 넋두리다. 원래는 장터목에서 1박 하려다 너무 힘들어서 세석으로 변경했다며 잘 한 거 같단다. 초보인 내가 보기에도 여러 가지로 준비가 허술해보였다. 배낭은 그렇다쳐도 스틱도 없이 긴 산행을 하는 건 무리다. 내일은 12시까지 비도 온다는데 어쩌시려는지.
막 치우고 일어나려는데 젊은 부부가 도착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잘 오셨다며 정말 수고하셨다며 아끼지 않고 반가움을 표했다. 두 분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라며 필요한 순간에 이끌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우리는 진심을 알아준 그들이 더 고마웠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뒷마무리를 했다.
모포를 받아 배정된 자리에 두고는 로비에 모여 남편의 동창부부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잠시 후에 목동 부부가 옆자리에 앉는다. 때마침 대피소에서 속보를 전한다. 현재 폭우경보가 내려진 상태라 내일 새벽 특보로 상황이 바뀌면 천왕봉 산행이 불가할 수 있으니 참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부는 내일 비가 많이 오면 천왕봉 등반은 포기해야 할 거 같다며 백무동으로 내려갈 생각이란다. 우리는 다시 무한긍정 모드로 두고 봐야 아는 거다, 힘들게 왔으니 미리 포기하지 말고 천왕봉은 찍고 가시라 권했다. 한 술 더 떠서 백무동 길은 비가 많이 오면 위험하니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 게 안전하다, 앞으로 가는 길은 여태 걸어온 길에 비하면 꽃길이다, 고생도 다 추억이니 꼭 올라갔다가 가시라 등등 온갖 좋은 소리로 두 부부를 적극 설득했다. 그나저나 비가 오면 걱정은 걱정이다. 에라, 모르겠다. 아침이 되어야 알 일이고 얼른 잠이나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