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하동 팔십리 길 위의 이야기

정진숙 2010. 5. 22. 21:05

 


 속살대며 흐르는 강물이 이야기를 건네는 듯 물색 고운 날이다. 이른 봄날 섬진강 줄기 따라 하동 팔십 리를 간다. 매서운 바람을 이기고 송림 사이로 어김없이 매화는 피었다.

 평사리 최 참판 댁 기와 담장 너머로 들녘 저만치에서 봄이 오고 있었다. 멀리 산자락 끝에 탁 트인 하늘을 이고 어슴프레 봄기운이 번지는 악양의 너른 들길, 마실 나온 서희아가씨의 사뿐한 발자욱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개화기 격변의 시대를 풍미하던 소설 토지의 주인공들이 현실의 인물인양 하동의 들판에 마치 살아 있듯 낯설지 않게 다가선다소설의 배경과 닮은 곳을 찾기 위해 하동의 곳곳을 섭렵했다는 드라마 연출자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나 보다.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한 참판 댁에 들어서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넉넉하게 펼쳐진 논과 밭의 편안한 풍경 너머로 유유한 섬진강의 물길이 반짝거린다초가집 벽에 기대선 매화나무에 수줍은 봄 햇살이 포근하게 깃들고 얼었던 마음으로 따사로움이 스민다.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고향집 흙벽의 아련한 향수를 마주한다.

 강을 안고 지리산의 품안에 깃든 화개장터에는 지나간 삶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그러나 잘 단장된 시멘트 길 위의 장터는 관광지일 뿐, 투박한 시골 장의 정취는 희미해지고 인스턴트의 건조함이 배어 있다. 옛 모습 그대로의 구수한 인심을 바람은 객지인의 욕심이리라.

 장터 옥화주막의 벽에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사연이 적혀 있다. 세상 떠도는 팔자를 타고 난 어린 아들 성기를 근처의 쌍계사에 맡긴 주막집 옥화는 체영감이 의탁한 딸 계연과 짝을 지어 아들의 역마살을 잠재우고 자신의 곁에 두려 한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을 거역치 못하고 출생의 비밀을 지닌 계연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장성한 아들 성기는 결국 길을 떠나고야만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주인공의 어미는 터를 잘못 택한 게 아닌가 싶다. 역마의 사연이 말하는 것처럼 이 고장은 결코 사람을 머물게 하는 곳이 아니다. 섬진강 넓은 하구의 물길은 발을 이끌어 또 다른 세상을 반드시 꿈꾸게 한다. 오늘도 재잘재잘 이야기를 품고 장터 앞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쌍계사로 오르는 산길은 고즈넉하고 맑다. 마른 가지 사이로 간간이 적막을 깨우는 새소리가 들린다. 옥화주막에서 마신 동동주 두어 잔에 사념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내딛는 발걸음에 번뇌는 흐트러진다.

 멀리 불탑 끝으로 하얀 봄날의 구름이 지나간다. 어쩌면 저렇게 왔다가 떠나가는 게 인간사건만 욕심은 쉽사리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존재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에, 아직은 세상에서 해야 할 숙제가 남았기에, 그리고 삶을 향한 치열한 애정이 살아 있음에, 마음 안에 욕심은 머무는 것이라 위로한다.

 대웅전 뒤로 보이는 지리산 자락의 후덕함이 편안해서 좋다. 여행이 주는 선물은 이런 순간들이다. 떠밀리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너그러운 눈으로 사위를 바라보게 하는 선물처럼 감사한 순간.

 강산의 찬바람이 제 아무리 손끝을 시리게 해도 오는 봄을 막지 못한다. 이제 4월이면 매화꽃 진자리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섬진강 물길을 환하게 밝힐 것이다. 꽃비가 흩날릴 황홀한 그 강변을 그리며 이른 봄날에 하동 팔십리 길 위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