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지리산 종주기 3

정진숙 2017. 8. 16. 20:14

 

 

 

 

<3일차; 세석에서 천왕봉, 천왕봉에서 백무동까지 16,7키로>

비 오는 날의 하산은 방학 전날 급하게 마무리 해야할 숙제처럼 버겁기만 했다. 이날의 숙제는 무조건 안전 산행이다. 다행히 폭우경보는 발효되지 않았지만 가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우의는 아예 입을 생각도 않고 여름비를 맞으며 걷는다. 커피 한 잔과 빵 한조각으로 요기를 마치고 배낭은 대피소 한 구석에 둔 채로 서둘러 산행에 나섰다. 출발 전 조금 늦게 기상한 부부 두 커플과 아침인사를 나누며 남은 일정을 서로 격려했다. 세석에서 천왕봉까지 5,1키로 왕복하면 10,2키로의 거리다. 하산은 길이 험한 백무동길을 피해 세석으로 되돌아와 한신계곡으로 내려가기로 정했다. 애초에 계획한 거리 13,3키로보다 3,4키로가 늘어난다.

 

어제 저녁 목동에서 온 부부에게 했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세석에서 천왕봉 가는 길은 지리산의 비경들이 즐비하다. 눈앞의 연하선경은 그야말로 꽃길이었다. 고산에 자생하는 여름 들꽃들이 능선 가득히 흐드러져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이다. 운무 아련히 피어오르는 새벽 산길의 몽환 속에서 구절초 하얀 꽃잎이 빛을 발한다. 원추리꽃, 동자꽃, 이질풀, 산오이풀, 엉겅퀴, 들국화, 쑥부쟁이가 선명한 자기만의 빛깔로 고운 색을 더하고 있다. 발 아래 세상은 구름에 가려지고 꽃과 나무와 안개비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선경이 정말 있다면 이런 풍경이 아닐까.

 

조망을 도무지 볼 수 없는 길을 걸어도 마음만은 즐겁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만나지 못할 이 길의 감흥에 푹 빠져 최고의 풍경을 누린다. 비에 젖은 발걸음에 걱정도 없이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 일출봉을 지나왔다. 잠시 후면 장터목이다. 지리산 종주 삼 일간의 대장정도 이제 끝이 보인다.

 

장터목에도 분주한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산객의 반 이상은 부모를 따라온 청소년들이다. 기특하고 대견한 아이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우리 아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사탕 한알로 허기를 달래며 천왕봉 1,7키로를 향해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숨을 몰아 쉬며 얼마 남지 않았다 서로를 다독인다. 여태 걸어온 길에 비하면 남은 길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제석봉 지나 통천문, 진짜 마지막 관문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천왕봉 1,915m 표지석이 비바람 속에 우뚝 서있다. 먼저 온 이들이 바람을 맞받으며 정상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지리산의 정기를 흠뻑 받고 가고 싶어서란다. 그 어느 때보다 벅차게 마주하는 천왕봉. 일출을 못 보면 어떻고 멋진 조망을 못 보면 어떠랴. 나의 두 발로 걸어 지금 여기 서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운무 속에 앉아 한 잔의 커피를 나눠 마시고 다시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제석봉을 지날 즈음 올라오고 있는 젊은 부부와 재회한다. 부부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반가워한다. 두 분 덕분에 천왕봉을 오를 수 있었다며 좋은 추억 만들게해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를 전한다. 좋은 추억이라면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힘을 북돋우며 오른 이 산길에서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세석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고 한신계곡으로 하산한다. 비는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내린다. 장터목 돌계단을 오르던 목동 사는 부부가 어찌 하산할 지 염려스럽다. 서둘러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더딘 걸음으로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엔 벅찬 거리다. 그저 두 분이 무탈하게 내려오기를 바랄 따름이다. 빗길 계곡에서 두어 번 엉덩방아를 찧으며 6,5키로 하산길을 마무리한다. 한신계곡 멋진 비경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하고 발끝만 바라보며 내려온 길이 아쉬워진다. 두해 전 가파른 이길을 오르며 매혹 당했던 기억이 언제 그랬나 싶을만큼 힘들고 지루한 하산이었다. 같은 길이 그때그때 달리 느껴지는 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변덕스런 마음 탓일 게다.

 

그나저나 우린 저 힘든 산길을 왜 걸었을까. 종주길에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산이 초행이거나 종주가 처음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용감하다 못해 무모하게 도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도전이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시작한 도전. 어쩌면 잘 모르기에 시작할 수 있는 만용. 어설프게 짐작만 하고 머뭇거리기 보다 과감하게 선택한 이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시속 1키로의 속도로 나흘 만에 긴 종주를 마친 세 식구에게 경의를 표한다.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를 수 있는 정상. 한 발 한 발 충실히 걷다보니 정상은 어느새 내 앞이었다.

 

백무동 민박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하고 고단한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리산동동주 한 잔에 도토리묵 한 점으로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지나온 산을 올려다보며 감회에 젖는다. 마침 낯익은 두 사람이 저만치서 내려오고 있다. 하산을 걱정했던 목동에서 온 부부였다. 여기서 또 뵙는다며 서로 신기해한다. 어떻게 이리 빨리 내려오셨냐 물으니 장터목에서 백무동길로 바로 내려온거란다. 그러면서 길이 너무 험해서 엄청 후회했다고. 두 분이 빠른 판단을 해서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했으니 잘 하셨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젊은 부부는 장터목대피소에서 하루 더 머물 거란 소식도 전해들어 우리의 염려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두 커플과는 첫날부터 끝까지 만나는 참 희한한 인연이다.

 

후두둑 거리며 빗소리가 굵어진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본지가 얼마만인가. 시원한 빗줄기가 총 거리 39,6키로 종주 사흘 간의 고생을 말끔히 씻어준다. 비록 힘들었어도 두고두고 얘기할 인생 한 장면을 새긴 멋진 삼 일이었다. 지리산의 마지막 밤을 기분좋게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