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하동 19번 국도의 벚나무

정진숙 2018. 4. 8. 19:08

 

 

화려한 봄날을 원 없이 누리다가

바람결에 홀연히 지는 꽃잎을 바라보면 괜스레 쓸쓸해진다.

매화, 동백, 개나리, 진달래, 목련꽃, 벚꽃

시간의 순리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꽃나무들

만화방초 온갖 꽃들이 피었다 지고

벚꽃 잎 하늘하늘 흩날릴 무렵이면 봄은 이미 절정이다.

꽃송이 째 뚝뚝 지는 동백과 목련이 처연하다면

벚나무 꽃의 여릿여릿한 낙화는 무어라 말하기 힘든 아릿함이 있다.

 

연분홍 꽃잎 흩날리던 사월 어느 날

하동에서 화개로 넘어가는 19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섬진강변 도로 양편에 가지런히 터널을 이룬 벚나무 길

수령 오랜 고목의 운치로 아름다운 그 길에

푸른 잎 돋아난 틈 사이 마지막 남은 꽃잎들이 지고 있었다.

일 없이 눈물 날 것 같던 봄날

그날 이후로 봄이면 이 길이 눈에 아른거리곤 했다.

 

작년 여름 힘겨운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진주에서 화개로 향하던 길이었다.

봄이면 지나치곤 하던 그 길이 여름 한낮에는 어떤 풍경일까,

두근거리며 차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동 읍내를 지나 평사리 삼거리가 가까울 무렵엔

보고픈 길을 혹시나 놓칠까 싶어 숨을 참아가며 창밖을 응시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사리 못미처부터 길 주변이 온통 파헤쳐져 있는 게 아닌가.

내가 그리던 길 양편의 벚나무 고목은 이미 베어 없어지고

어이없게도 흙더미만 사방에 쌓여있었다.

이 무슨 변고인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봄날 그리도 어여쁜 꽃을 피우던 벚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다니.

길만 넓히면 다 되는 건가.

그 꽃나무를 보러 먼 길 달려오는 이들을 어찌하라고.

가슴 턱 막히던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갑갑해지는 기분이다.

 

요 며칠 전 19번국도 확장을 위한 지자제의 행정운영에

하동지역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도로를 넓히는 공사 중 벚나무 고목 수백 그루를 베어낸 실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미 잘려나간 나무가 수백 그루인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뭐하나 싶었다.

알고 보니 공사 진행으로 앞으로도 베어질 나무가 수두룩하단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문제를 제기한 하동주민들께 감사한 맘도 들었다.

 

다음 주면 하동 봄 길로 때늦은 꽃 마중을 간다.

그나저나 휑해진 그 길을 마음 아파 어찌 볼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