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 가는 길
철쭉명소 황매산으로 가는 아침이다. 한 달여를 꼬박 준비한 산행이다. 첫 걸음길에 겁도 없이 리딩을 맡았으니 용감한 건가 무모한 건가. 키스를 글로 배웠다는 누구처럼 그야말로 황매산을 글로 배웠다. 소싯적에 공부를 그리 했으면 박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게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며 열중했던 것 같다. 눈 감고도 그려질 듯 산행코스를 꿰차게 되었으니 무모함에도 노력만은 가상하다.
올해 철쭉축제 마지막날이라 많은 인파와 교통량이 제일 큰 걸림돌이었다. 전날 종일 내린 비 덕분에 거짓말처럼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무사히 산청군으로 진입했다. 초록잎 나풀거리는 수풀사이로 좁은 국도를 지나며 한껏 가슴 부풀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여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웬걸. 목적지인 산청을 지나 합천쪽으로 버스는 가고 있다. 화들짝 놀라 기사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여쭸다.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은 우리가 원한 산청 신촌마을 들머리가 아닌 황매산으로 목적지를 설정해두셨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접근하게 되는 합천군 코스로 안내 될밖에.
미리 주소지를 확인하지 못한 내 불찰이 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초행길임에도 경로가 달라짐을 빠르게 눈치채어 그나마 길을 되돌릴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청 오지의 푸르른 오월 풍경을 감상하며 잠깐의 경로 이탈도 나쁘지 않다고 모두가 긍정의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루에 열 두번도 더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신촌마을 도로에서 내려 가파른 임도를 오르는 동안 또다시 속이 타들어간다. 영화주제공원 주차장까지 가주길 바랐건만 기사님은 갈 수 없다며 우릴 내려두고 날머리 모산재주차장으로 가셨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철쭉제 행사가 진행 중인 영화주제공원에 어렵사리 도착했다. 맙소사, 주차장에 떡하니 도열한 대형버스들. 이 무슨 개고생을 시킨 건지.
나무그늘에 자릴 펴고 식사를 마쳤다. 마음 추스리며 이제부턴 꽃길만 걸으니 안심하시라 산우들을 다독였다. 걱정반 기대반으로 황매평전을 향했다. 잠시 걷자마자 터지는 탄성! 진짜진짜로 꽃길이 펼쳐져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 곱게 핀 꽃잔듸에 이어 붉은 철쭉꽃 능선을 만나는 순간 아까의 고생은 언제그랬냐는 듯 날아가 버렸다. 광활한 황매평전의 탁 트인 조망에 저절로 기분 좋아진다. 힐링, 그 흔한 단어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꽃보다 황매산, 철쭉은 거들 뿐 황매산의 산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유유자적 드넓은 황매평전을 소요하며 짧은 시간 머무름을 안타까워한다. 한없이 그저 바라만봐도 좋을 것같은 이 절경을 두고 돌아서기가 아쉽다. 길은 멀어 천리길, 상경길 걱정에 하산을 서두른다.
모산재 오름길 백여미터의 가파름이 잠깐동안 발목을 잡는다. 땀 흘리며 오른 모산재 767고지의 풍광은 황매산 산행의 압권이다. 너른 황매평전의 안온함과는 또다른 반전이었다. 장쾌한 수묵필치의 선 굵은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아, 하고 탄성이 터지는 멋진 암릉구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힘겨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이런 맛에 있다. 자연 속에서 작은 존재인 나를 확인하는 것에.
영암사지로 하산하는 동안 암릉구간이 이어진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바위길에서 쩔쩔매는 나를 보고 '에이, 대장님이신데' 하는 산우 한 분. 에구구, 초보대장인 걸 들켰다.
처음 가는 길을 리딩한다는 건 어불성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 잘 해내겠다는 열의가 부족함을 메우는 자극제가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기상이며 도로 사정, 이동 시간 등등. 우려했던 모든 상황들이 모두의 간절한 바람 덕분에 좋은 쪽으로 풀려서 완벽에 가까운 하루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착오없이 무사히 산행 마칠 수 있도록 큰 도움주신 여러 대장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황매산 가는 길, 첫 산행이란 의미에 기분 좋은 추억까지 더한 뜻깊은 길이었다. 우여곡절 많은 에피소드에 함께한 이들의 고운 마음까지 보태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황매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