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떤 우정

정진숙 2019. 9. 26. 10:04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가 보다. 여고 동창인 우리 셋은 그시절의 복기 내용이 사뭇 달랐다. 각자의 관심사가 틀리니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도 참 신기했다. 한 날 한 시에 겪은 일이 서로 다른 추억으로 남았다니.

 

1학년 초와 졸업 무렵 동문인 박완서님을 모교에서 뵌 적이 있다.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는 그 분과의 인연에 대한 글을 한편 남기기도 했다. 두 친구는 나의 옛 이야기에 생소하다는 반응이다. 학교에서 언제 뵌 적이 있었냐며 갸웃거린다. 어떤 장면을 설명하자 Y는 생각난다며 맞장구를 치고 J는 모르겠다며 도리질이다.

 

여고 동창 중 최근까지 만나는 친구는 Y와 J 둘이 전부다. 한 다리 건너 소식 듣는 이들은 몇 있지만 만남을 갖진 못한다. 간간히 안부 전해 들으며 보고 싶다는 넋두리만 가끔 나눌 뿐이다.

 

1학년과 3학년 때의 짝꿍인 Y는 세네갈에서 목사인 남편과 6년째 선교활동 중이다. 말 설고 물 설은 그곳에서 원주민 아이들을 위한 교육봉사로 세네갈 당국에서 수여하는 감사장을 받은 일화도 전해왔다. 해마다 4월 초면 보름여 동안 한국에 들어와 가족들을 돌보거나 필요한 업무를 보고 돌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잠시 짬을 내어 빠뜨리지 않고 우리를 만났다.

 

2월 말이던가. 올해는 유난히 일찍 연락이 왔다. 무척 반가웠지만 정해져있던 귀국 일정에서 벗어난 게 조금 의아했다. 의정부에 있는 Y의 집에서 모이기로 하고 당일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수락산역에서 J와 만나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이상하던 예감은 적중했다. 늘 그랬듯 씩씩하게 잘 지내는 줄만 알았다. 먼 이국에서 힘겨웠는지 Y는 큰 병을 얻어 치료차 귀국한 것이었다. 착한 암이라지만 큰 수술과 힘든 치료과정을 거쳐야하는 유방암 2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우리에게 연락했을 땐 이미 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 중인 시기였다. 많이 힘들 텐데 Y는 여전히 쾌활하다. 우린 친구의 변함없는 모습에 안도하며 마음 놓고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여름날 어느 아침 수락산역에서 의정부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Y의 집으로 가는 날 J는 한 살림 챙겨 바리바리 카트에 싣고 전철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친구를 위해 맛있는 걸 해 먹인다고 이른 시각 한 짐 챙겨 나온 J의 정성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휴무일마저 단 하루도 집에 붙어있지 못하는 불량주부인 나와는 반대로 J는 단 하루도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업주부이다. 구순이 넘으신 홀시어머니를 신혼부터 여태 모시고 있으니 요즘 보기 드문 효부이기도 하다. 숙련된 주부 9단의 솜씨로 J가 뚝딱 차린 식탁에 둘러앉아 그날 하루도 수다삼매경.

 

하는 일 다르고 개성 다른 우리를 공통으로 묶어주는 건 여고 삼년의 추억이다. 짧은 그 삼년이 이어준 사십 년의 긴 세월, 그 동안 나눈 우리의 대화는 시대초월 주제초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용들이다. 매번 빤한 이야기이지만 늘 즐겁다. 퍼내도 퍼내도 샘솟는 샘물처럼 십대의 맑은 추억들이 오십대 막바지 추레해져가는 마음을 말갛게 씻어준다. 비록 고통스런 병마가 우리 곁에 있어도 추억 속에서 즐거운 순간만큼은 아픔을 잊는다. 그래, 따뜻한 추억과 우정의 힘으로 암 따위 같이 이겨내 보자. 친구야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