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이른 봄마중 길, 이천 경사리
정진숙
2021. 9. 19. 09:07

춘래불사춘, 온 강산에 봄이 찾아왔건만 마음의 봄은 아직 먼 듯하다. 설렘으로 봄 마중하던 지난봄들이 더더욱 아쉽고 그립다. 조심스레 봄길 찾아 집을 나선다. 샛노랗게 꽃망울 터뜨린 산수유꽃. 희망의 봄꽃 만나러 산수유마을로 봄마실 떠난다.
경강선 전철로 한 시간여만에 이천역에 도착했다. 역 앞 정류장에서 도립리행 버스로 갈아타고 산수유마을 입구에서 내린다.
춘 삼월 해사한 봄 햇살 아래 황구 두 마리가 느긋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졸린 눈꺼풀을 껌뻑이며 몸을 뒤채는, 세상 편안해 보이는 황구가 경사리의 평화로운 오후를 대변해준다. 꿈꾸는 나무 산수유는 파스텔 빛 배경으로 온 마을에 몽환의 꿈을 흩뿌린다. 그저 풍경 속에 서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봄날. 감미로운 이 봄날.
노란 산수유 꽃 나른하게 핀 몇 해 전 오후도 그랬다. 사람들을 따라 붐비는 경사리 골목길을 걸어갔다. 담장 없는 마당에 집집마다 좌판을 펼치고 온 동네가 봄꽃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흥겨움 속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번지는 시골마을길. 북적이는 그 길을 걷다가 어느 한집 앞에서 멈춰 섰다. 마당 한켠으로 장독대가 놓인 소박한 뜨락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테이블 두어 개에 집안의 의자를 죄다 꺼내 두고 외지인들에게 음식을 팔고 있었다. 축제 기간 동안 마을 어르신들이 각자의 집에서 주류와 단촐한 식사류를 파는 게 정겨워 보였다.
경사리 뜨락에서 낸시 시나트라의 썸머와인을 흥얼거리며 연분홍 산수유주에 흠뻑 취했던 봄날이다. 목적지인 원적산엔 한발자국도 못 오르고 시골집 마당에서 짧은 춘몽만 꾸었다. 이름도 모르는 옆 자리의 낯선 이들과 속없는 말 몇 마디 섞으며 웃고 떠들었다. 그저 따사로운 봄이 너무나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즐겁고 아무 조건 없이 행복할 수 있는 하루, 살면서 하루쯤 그렇게 흥겨이 흘려보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멍 때리며 마음 헐거웠던 봄날, 달뜬 봄기운에 한껏 취했던 경사리 그 하루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미소짓게 한다.
올해 봄도 그때처럼 제 흥에 겨워 경사리 봄꽃 길을 걸었다. 감염병으로 험해진 세상사 잠시 잊고 짧은 봄날의 한복판을 걷다가 돌아왔다. 사람들 눈치 보며 봄길 꽃길 걷기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더이상 미안해 하지 않고 편안히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른 돌아오기를 손모아 빌어본다.
2020. 3
도립리 산수유마을-영축사-육괴정-낙수재-경사리 벽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