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 박인환

정진숙 2022. 2. 4. 00:46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ㅡ박인환


한때
시, 목마와 숙녀
페시미즘의 시인
박인환에
열광할 때가 있었다.

사실
더 이상 꿈꿀 게 없었던 그때도
지금보단
더 희망적이진 않았을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위안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이 시간.

시간의 압박만큼
절대 절명인 건 없으니
더 이상의
페시미즘도
소용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