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평론
현 한국 수필작단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이 유식
1. 들어가는 말
오늘의 수필작단을 둘러보면 실로 감회로운 바도 없지는 않다. 지난날에 비하면 좋게 말해 가히 백화만발의 제철을 만난 듯싶다.
우선 수필가의 숫자만 해도 시인들에야 못 미치지만 그 어떤 장르보다 우세를 보이고 있다. 문협 가입 회원 수만 보아도 소설이나 아동문학보다도 훨씬 많다. 뿐만 아니다. 이에라도 부응하듯 세월과 함께 차츰 전문지가 늘어나 이제는 글만 잘 쓰면 지면이 없다고 한탄할 게제도 아니다. 그러니 열세 장르로 마냥 ‘서자문학’, ‘주변문학’으로 내몰리다시피 했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감회롭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 빛의 그림자 같은 어두운 면이 있어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백화만발 뒤에는 백화난발도 있고, 잡초도 자생하고 있다. 마치 동아마라톤대회 같이 서로 어울리다 보니 프로(전문 수필가)와 아마추어의 구분이 차츰 없어져 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프로(등단 수필가)가 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 프로가 아마추어 수준인 경우도 많다.
그러고 보면 수필문학사의 흐름으로 보아 되살아난 망령처럼 수필이 또 다른 ‘여기의 문학’ 시대를 맞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1920년대부터 광복 그리고 50년대와 60년대를 크게 보아 다른 장르의 비전문 수필인들이 자기 글의 ‘여기’로 수필을 써 왔다면, 지금은 많은 수필가들이 전문이 아니라 생활의 ‘여기’ 내지 삶의 ‘여유’나 ‘여가’선용의 문학으로 취미삼아 글을 쓰고 있다는 혐의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본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고 또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면 된다는 안이한 의식이 마치 신종플루처럼 퍼져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지난날에 비하면 수필을 ‘잡문’시 하는 경향이 깨끗이 청산된 것만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연조나 이름 있는 문학지들 그리고 신춘문예를 모집하고 있는 주요 신문사에서 수필을 그렇게 곱지 않게 보고 있다는 단적인 사실만이라도 반성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물론 해당 지(誌)와 지(紙)의 권위주의적 의식이나 발상도 문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필작단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되짚어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요는 수필이 별도의 관심 대상이 되기에는 양적인 면에 비해 질적 수준의 힘이 매우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반성해 볼 일이다. 수필의 고품질화가 요청된다. 수필이 70년대에 그나마 비로소 제도권내의 정식 장르로서 편입되었고, 80년대에는 수적 팽창이 시작되어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도약기를 맞이했고, 2000년대 지금은 물량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했다고 볼 수는 있겠으나 이를 그냥 방심해서는 안 되리라 본다. 타 장르와 당당히 맞서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백화만발이라면 그 텃밭을 다시 곱게 가꾸어야 할 것이고, 백화난발이라면 정리가 있어야 할 것이고, 잡초가 있다면 뽑아야만 할 것이다.
나의 이런 고언(苦言)이 앞으로 수필작단에 명실상부한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또 보다 나은 미래를 열기 위한 조그마한 디딤돌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2. 문제점과 해결방안
여기서는 우리 수필의 질적 제고를 위한 종합검진이라기 보다 평소에 본인이 생각하고 있었던 수필작단의 몇 가지 문제점에만 한정시켜 그런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며 동시적으로 그 해결방안을 개략적으로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신변수필이 너무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질 좋은 신변수필이야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라 해서 그런지 대부분의 수필가들이 직접적인 체험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높다. 그러다 보니 신변적인 이야기인 ‘1인칭 수필’ 내지 ‘신변수필’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 체험이나 느낌이 독특한 것은 가뭄에 콩 나듯 이고 역시 그 작품이 그 작품인 장삼이사(張三李四)이기 마련이다.
문제는 신변수필이 수필이란 탈을 쓰고 ‘잡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뜻이다. 신변잡기란 문자 그대로 자기 일이나 또 자기 주변 이를테면 가족이나 직장이나 일상사의 체험을 단순히 늘어놓는 식이라 하겠는데, 이런 수필은 수필의 토양이 척박했던 지난 시절에는 애교로서도 예쁘게 봐 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설사 불량품은 아니더라도 그런 수필은 의미성이 거의 없다. 지겨울 정도로 거의 동음반복적인 그런 작품에는 식상해 있고 염증을 느끼고 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 하지 않던가.
신변수필이라고 무조건 폭력적으로 폄하나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질이 높다면 얼마든 환영받을 수 있지만, 대개 잡기로 끝나고 있는 그 함량미달이 문제다. 질 높은 신변수필이라면 개인적 체험이 고도의 예술적 여과를 거쳐 질서화 내지 의미화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보편적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감동을 받을 수 있거나 아니면 공감도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한편을 쓰더라도 문학성 있는 신변수필이 되도록 각별한 작법적 반성이나 고민을 해야 되리라 본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소재면 소재일수록,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기에는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작법의 반비례 원칙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 수필계에서 단기간이다시피 한 기간 내에 수필가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어나게 된 배경에는 물론 문학저널리즘이 부추긴 면도 있지만, 상대적으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신변적인 자료가 있으니 웬만한 문장력과 작문능력만 갖추면 쉽게 수필가가 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도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둘째는 오늘의 수필작단이 가벼운 경수필 일변도인 만큼 역으로 중수필이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우리 수필의 장르적 발전사를 고려해 보아 이제는 중수필이 많이 나와야 할 때다. 객관 수필, 지적 수필이나 논리 수필 등등이 많이 나와야 한다. 비유해서 말하건대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에 따라 무기무장도 경무장에서 중무장으로 또 공업도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바뀌듯이 반드시 중수필이 생산되어야 한다는 이치다.
그런데 실로 좋은 중수필을 쓰기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런 중수필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직접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간접적인 체험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간접적인 체험이란 한마디로 독서를 통한 폭넓은 교양이나 지식축적을 말한다. 특히 지식을 두고 말해보면 이때의 지식은 학자와 같은 깊은 지식이나 외골수의 지식이 아니라 이른바 잡학박사 식의 폭넓은 지식이다.
여기서 특별히 이런 점을 강조해 두는 이유는 그 유용성이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1)중수필의 중요한 제재를 얻을 수 있다. 2)소재의 고갈을 극복할 수 있다. 연수필에만 매달리다 보면 곧 소재의 고갈을 체험할 것이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틈새시장이 곧바로 중수필이다. 그 다음은 부차적인 유용성도 있다. 1)예화를 풍부하게 하여 독자들에게 지식정보 내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다. 2)글의 전개에 있어 필요시는 인용법, 대조법, 비교법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준다. 3)타인의 지적 활동을 통해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폭넓게 또는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한 공부나 노력투자도 없이 그저 직접체험에만 매달리다 보면 중수필 쓰기가 더욱 어렵거나 또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경수필의경우도 특색도 없고, 재미도 없다는 소리가 자연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사실 중수필 한편 쓰기란 연수필 한편 쓰기에 비하면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재 구하기와 생산공정 등이 모두 그렇다. 한 예로 우선 제재 구하기부터가 힘이 든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중수필에 과부족 없는 제재 찾기에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폭발력이 있는 압축된 ‘단소경박’형 찾기다. 바꾸어 말해 양이 많은 폭약TNT나 다이너마이트 보다는 극소량으로 최고나 최대의 폭발력을 갖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과 같은 자료를 찾아야 한다는 논리요 이치다. 그렇지 않고 만약 어느 누가 순진하게도 중수필이란 말에 단순히 현혹되어 ‘장대중후’형의 제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면 십중팔구 소논문식이거나 논설문식으로 끝나기 마련일 것이다.
아무튼 단소경박형을 제재로 한 질 높은 중수필에서 인생의 진실이나 어떤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촌철살인적 중수필다운 효과요, 그 멋과 맛이라 하겠다. 이를 다시 한 번 바꾸어 말해 보면 중수필이라 해서 ‘장대중후’한 큰 창문식 제재를 통해 세상사나 인간사를 바라다 볼 것이 아니라 ‘단소경박’한 제재 즉 바늘구멍이나 열쇠구멍 또는 문구멍으로 바라다보는 것이 긴장과 짜릿함의 멋이 있고 또 중수필이 빠지기 쉬운 함정인 무미건조성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중수필의 집은 소논문식의 큰 간판이 대로변에 거창하게 붙어 있는 ‘불고기집’이나 ‘불갈비집’이 아니라 골목 어귀 어디쯤에 있음직한 ‘꼬리곰탕집’이거나 ‘족발집’에 비유될 수도 있다.
셋째는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인 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기행수필이 무척 많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에도 문제가 있다. 상당수의 기행수필이 기행문에 끝나는 것 같다. 기행문에서 더욱 진화한 형식이 바로 기행수필이 아닌가.
사실 지난 시대에 있어서는 적어도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풍물에 관한 정보 제공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과 관심을 끌 수 있었고 또 수필로서도 당당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외국을 안방 드나들듯하고 있기에 이제는 기행문 류의 효용가치는 자연 소멸되어 버렸다.
원래 기행문이란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실 위주로 한 기록성의 단순한 견문기다. 그러나 여기서 진화된 기행수필은 이런 기록성에만 끝나지 않는다. 최소한도의 문예미학을 살려내려면 그 기록성의 자료(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각 소재의 성격에 따라 정서적 여과나 지적 여과 아니면 혼성 여과를 거쳐야 한다.
정서적, 심적 여과라면 인문학적 관조나 명상, 비교문학적 접근이나 해석 아니면 개별 소재에 대한 작가 나름의 해석이나 의미부여 등이 나올 수 있다. 원유를 정제하다 보면 여러 화학물질이 나오는 것과 같은 여과요 정제과정이다. 그것을 다시 비유적으로 달리 말해 보면 양조과정에서 숙성이나 증류과정을 거치는 경우와 흡사하다. 그리고 난 다음이 문학성의 창출이다.
따라서 기행문과 기행수필에 있어서는 지금 말해 본 소재 문제 처리는 물론 더 나가보면 주제의 형상화와 구성법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도 있다. 기행문이 다분히 견문 나열식이라면, 기행수필은 주제 형상화를 위한 취사선택식이다. 기행문의 주제가 분산적이거나 다초점적이라면, 기행수필의 경우는 반분산적이거나 집중적이다. 기행문의 구성이 대개 시간의 순행구조에 의존한다면, 기행수필은 순행구조일 수도 있고 또 역행구조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또 다른 다양한 변조를 시험할 수도 있다.
요는 이런 작법적 문제 해결방안만이라도 가지고 우리 수필가들이 기행수필에 임해 왔고, 임한다면 수필의 질적 제고가 크게 향상 되리라고 본다.
넷째는 수필작단의 구태의연한 전반적인 매너리즘도 문제다. 행여 나는 몸보신을 위해 달팽이처럼 구각의 껍질 속에 웅크리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편안하고 무탈하다고 남이 닦아 놓은 고속도로나 포장도로로만 다니지 않는가 하고 반성해 볼 필요도 있다.
세상도 변하고 기호도 변하며 감각이나 감수성도 변한다. 과연 나는 그에 상응할 수 있는 도전정신, 바꾸어 말해 탈 매너리즘 정신이 있었는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근래에 와서는 시대적 변화의 욕구에 맞추어서 이른바 ‘퓨전수필’이란 장르가 논의되고 또 정보화 시대의 속도성에 맞추어서는 5-6매 정도의 ‘단형수필’의 필요성도 제기되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개척해 볼만한 새로운 장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실정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새로운 장르의 개발이 꼭 능사일 수는 없다. 그러나 설사 시행착오가 있다 할지라도 그런 노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발전이나 진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새로운 소재, 새로운 주제 발견에도 소홀한 것 같다. 각자가 조용히 반성해 볼 일이 아닌가 싶다.
3. 나가는 말
대충 앞에서 네 가지 문제점에만 한정시켜 간략하게나마 그 해결방안을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수필비평을 하는 사람으로서 평소에 느꼈던 점 그리고 수필을 직접 쓰는 수필가로서 체험했던 산통이나 산고를 종합해 보았다.
아쉬우나마 우선 이 정도 선에서라도 우리 다 같이 아파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무어니 해도 ‘환골탈퇴’와 ‘도전’정신이 요청된다. 일견 수필의 중흥기를 맞고 있는 지금, 미래의 황금기를 기약하고 앞당기려면 이 두 단어가 행동강령의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낙숫물이 모여 도랑물이 되고, 또 도랑물이 모여 개울물이나 냇물이 되고, 또 이것이 모여 강물이 되듯, 개개인의 보이지 않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영토주권이 없어 방황하던 이스라엘민족처럼 아니 저 중국 춘추 시대의 고사에 나오듯 수필이 주변문학으로서 맴돌았던 지난 시절을 생각해 보아서라도 와신상담하고 볼 일이다.
잠깐 여기서 수필문학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다시 짚어보며 다음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1920년부터 광복 그리고 50년대까지가 여기의 시대, 60년대가 수필전문화를 위한 과도기, 70년대가 수필전문화 시대인 동시에 성장기, 80년대가 최초의 수적 팽창시대, 90년대는 도약기요, 2000년대는 폭발적인 팽창의 중흥기인 셈이다.
그러나 비대해지면 성인병에 걸리기 쉽고, 다산도 하다 보면 옥석구분이 어렵기 마련이다. 체중감량도 필요하고, 신인등단이건 작품생산이건 산아제한도 필요하며 건강증진이나 유지를 위한 운동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2010년대 어느 시기쯤에 가서는 명실상부한 ‘수필의 시대’를 열어가고, 미래문학의 선두 장르로서 각광받는 귀한 장르가 되었으면 한다. 신천지를 찾아 나서듯,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서듯 수필문학의 황금기를 열기 위해 매진하고 또 매진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