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남해 푸른 바다를 걷다

정진숙 2012. 4. 30. 13:35

  구례 하동을 지나는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로 이어지는 길은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면 별천지로 변하는 길이다. 두어 해전 하동에서 남해대교를 넘던 4월의 기억은 아름다웠던 그 길로 인해 남해를 환상의 섬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중 하나, 꽃비가 내리는 그 길을 지나는 동안 한참을 몽환적인 감상에 젖었던 것 같다. 남해 바래길을 걷는 오늘은 그때를 떠올리며 더욱 들뜬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자그마한 항구 평산항은 새벽잠에 잠긴 채 평화롭게 흔들리고 있다. 싱싱한 봄 바다의 비릿함이 기분 좋게 코끝에 닿는다. 하늘 위엔 잔별이 남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분주한 발자국들이 작은 소란을 일으키자 마을 여기저기서 개짓는 소리가 들린다. 동네 분들이 깰까봐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으며 다랭이지겟길로 들어선다. 바다를 사이로 여수가 마주보이는 언덕길이다. 봄기운이 움트는 밭고랑의 흙냄새를 맡으며 여명 속을 걷는다. 연한 바다내음과 간지러운 공기가 숨을 들이킬 때마다 상쾌하게 스며든다.

 바래길은 예로부터 주민들이 바다를 생명으로 여기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갯벌로 다니던 생활의 터전이다. 이제는 척박한 생활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 둘레길이 된 이 길은 바다를 끼고 작은 마을로 이어진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소박한 어촌마을, 유구마을, 사촌마을, 선구 몽돌해안을 지나 가천마을까지 가는 길이다. 연두 빛이 번지는 들과 산의 평안함이 이른 아침 바다의 고요와 어우러져 더 바랄 것 없는 여유로 다가온다.

 향촌 조약돌해안을 지나 향촌전망대에 오른다. 바닷가 오막에서 클레멘타인처럼 유유자적 살고픈 소망을 품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소망의 바다가 이 곳 남해가 아니었을까. 어디를 보아도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래서 남해를 보물섬이라 말하나 보다.

 가천다랭이 마을로 가는 길은 아쿠아마린 빛의 지중해가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사진으로 본 어느 휴양지의 풍경 못지않게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넓은 바다의 장쾌함과 절벽이 어우러진 절경은 말로 다 하기 힘들다. 곳곳에 지어진 제각각의 예쁜 펜션들은 여기가 유럽 어디쯤 아닌 가 착각하게 만든다. 여태 지나 온 우리네 아기자기한 마을과는 너무도 다른 장면이 색다르다. 여유가 된다면 이런 낭만을 즐겨봄도 나쁘지 않겠다.

 펜션촌을 지나 드디어 목적지 가천마을에 당도했다. 가파른 논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우와 하는 탄성이 터진다. 바다에 연한 비탈길을 층층이 개간해 논으로 만든 사람의 강인함이 놀랍다. 논밭 사이사이로 가파른 길 따라 민가가 빼곡하게 이어진 이 마을은 마을 전체가 명승지로 지정된 스타마을이다. 매스컴을 자주 타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와 곳곳에 민박을 하고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민박집 마당 평상에 앉아 지는 해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멋을 한번 느껴보고 싶다.

 언덕바지 끝에는 폐교가 있다. 이순신장군 동상이 정면에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 초등학교 교사. 운동장엔 듬성듬성 풀이 나고 교실의 나무 바닥은 부서져 군데군데 꺼졌다. 삐걱거리는 좁은 복도를 따라 이리저리 걸어본다. 깨진 창문이 오히려 정겨운 건 무슨 이유인지. 낡은 암녹색 칠판에 흰 백묵으로 다녀간 이들이 흔적을 남겼다. 아무개 몇 월 몇 일 다녀간다. 이대로 영원했으면.......

 넘치고 부족함이 없는 물질만능의 시대지만 물욕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게 감성의 영역이다. 너무 빠르게 달라진 세상에서 무얼 잃은 지도 모르고 지낸 시간, 문득 내가 지니고 살았던 많은 것들이 사라진 걸 깨닫는다. 해서 남아 있는 다른 이의 흔적이라도 기웃거리며 엿보게 된다. 추억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남의 추억을 빌어서라도 나의 지난날을 찾고 싶어진다. 나의 여정은 어찌 보면 타인의 것을 통해 나를 찾아보는 추억여행일 것이다. 남해바래길 푸른 바다 길이 넉넉한 그 품을 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