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나는 흉노의 후예였다? 문무왕릉 대왕암,감은사지

정진숙 2012. 10. 21. 10:28

봉길 해수욕장과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라 불리는 대왕암 - 경주시 양북면

 

울산 간절곶에서 해안길을 따라 조금가다보니 서생포라는 자그마한 포구가 나왔고

그 포구앞에 있는 강을 하나 건너자마자 거대한 산업단지가 보였는데

앞뒤좌우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진 어마어마한 산업단지였다

 

그 산업단지를 지나 약20분정도 산악길을 타고가다 해변길로 접어들었을때

제법 큼직한 해수욕장하나가 보였는데 그것이 강동해수욕장이라나 머라나...

 

여튼 그 강동해수욕장에서 해변길을 따라가다가 다시 또 산악길로 접어들었는데

산길을 한바퀴 휘~ 돌아내려오니 또 하나의 큼직한 해수욕장이 보였고

그 해수욕장 정중앙으로는 금방이라도 물에 잠길듯한 자그마한 암초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봉길해수욕장이라고 하는데 해수욕장 정면으로 보이는 바로 그 암초...

그 암초는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고 말로만 들어왔던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경주시 양북면이라고 한다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라 불리는 대왕암 - 경주시 양북면(봉길해수욕장 정중앙)

 

신라의 29대왕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놓고

백제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면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은 북쪽의 고구려를 무너뜨린후

한반도에 주둔하던 당나라라도 서서히 몰아내면서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점령

사실상 삼국통일의 모양새를 갖추어놓은 왕이라 할수 있다

그후 신문왕과 효소왕을 거쳐 성덕왕때까지 신라의 황금기로 전해진다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라 불리는 대왕암 - 경주시 양북면(봉길해수욕장 정중앙)

 

예전에 중학교시절 국사시간에 신라 문무왕릉에 대하여 선생님께 질문을 한적이 있었다

" 바다속에 무덤을 만들었으면 금방 고기밥되고

또 바로 썩어버릴텐데 왜 하필 그곳에 무덤을 만들었나요 ?

그리고 바다에 무덤을 만들수 있는건가요 ? "

 

그때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 아...아무개학생 참 좋은 질문이다. 대왕암에 문무왕의 관을 뭍은것이 아니라

문무왕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한 것이고 

그 유골을 대왕암이 있는 바다에 뿌린것이다 "  

 

" 저기요...그러면요...문무왕이 어떤 유언을 했었나요 ? "

" 아...그건 말이다...당시 신라의 동해엔 왜적의 침입이 많았는데

문무왕이 죽기전 자신은 용이되어 왜적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해야겠다는...

그러니까 신라를 지키기 가장 좋은 자리가 저 대왕암이라...

이를테면 머...그런 유언 아니겠는가...? "

 

그로부터 수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그 물속에 있다는 문무왕릉을 실물로 보고 있는것이다

문무왕이 죽기전 자신은 용이 되어 조국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했고

그 유언에 따라 바다 한가운데 릉을 만들었다는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화장하고 난뒤 그 뼛가루를 대왕암 부근에 뿌린것인지

아니면 유골함을 만들어서 대왕암에 안치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는 아는바가 없다

 

봉길 해수욕장과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라 불리는 대왕암

 

문무왕의 릉이 봉길해수욕장 정중앙 바다 한복판에 있다면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다는 문무왕릉비는 지금은 어디에 있는것일까 ?

 

그에 대해서는 얼마전 어느 신문의 기사에서 읽은적이 있었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문무왕의 비는 조선정조때 비석조각 2개가 처음 발견되었다 다시 분실되었는데

60년대초 경주의 동부동 마을 주택에서 그 한개가 발견

그리고 2009년 같은 경주 동부동의 또 다른 주택에서 비의 위에부분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문무왕릉비가 분실되고 2백여년만에 모두 발견된것이다

2009년에 발견된 비의 조각은 당시 주택내 수돗가에 시멘트로 박혀있었고

표면은 훼손되고 가장자리부분은 많이 닳아있었지만

비의 내용을 판독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충주 가금면인가...여튼 그곳에서도 서기 400년대 중반경에 세워졌던것으로 추정되는

중원 고구려비도 동네 우물터인가 빨래터인가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솨람들이 감히 왕의 비를 빨래판으로 쓰고 있었다고...?

 

하긴머...이게 먼가 했다가 글자로 움푹 패인곳에 빨래를 벅벅 문대면

대박이겠다 싶어 빨래판으로 사용했겠지 머...

나부터도 그랬겠다

 

봉길 해수욕장과 문무대왕의 수중릉 대왕암

 

한데...왜 ? 문무왕은 자신의 비에서 신라의 김씨왕조는 흉노의 후예라고 했을까 ?

중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사람이 당나라군사 마져도 물리친후  

북방 흉노제국의 후예임을 왜 ? 자랑스럽게 문무왕비에 새겨 넣었던 것이었을까 ?

 

그것은 한반도의 영토에 야심을 품고 삼국을 통일시켰던 문무왕 자신이

중국 당나라의 주장대로 중국의 후손이 아니라 당시 세계최강의 중국 한나라를 복속시켰던

북방 흉노제국의 후예임을 온 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

 

여튼 이러한 사실들이 신문과 TV에서 연일 방송되고 기사화되고 난후

한반도에서는 흉노족, 홍어족이라는 흉흉한 말들이 은밀하게 나돌기 시작했고

경상도 흉노족, 전라도 홍어족...등등 서로를 비방하고 비하시키면서

한반도는 이상한 기류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경상도에서 일어난 흉악범죄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오면

역시 흉악범죄는 흉노족들이 다 저지르고 다니는구만...

이런 흉흉한 댓글로 이어지고 

 

반대로 전라도에서 일어난 흉악범죄 기사가 올라오면

어응...? 홍어족들 하는짓거리가 다 그러치 머...

 

한데...

얼마전 충청남도 아산시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원인을 알수 없는 방화 사건이 일어나

그곳에 살던 노인이 사망하자 또다시 흉흉한 댓글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건 분명 충청도로 이주한 흉노족들 행위가 분명해...

아녀...저건 충청도로 진출한 홍어족들 짓거리가 맞을겨...

 

역시 신라의 귀족인 김씨는 흉노의 후손이었어

왜 ? 그곳에는 흉악한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것 같애

 

홍어족은 역시 야만족 왜놈들과 같은 패거리였어

왜 ? 그곳엔 무지막지한 사기꾼들이 많은지 이제야 알것 같애...등등...

 

이렇게 지금 한반도는 알게 모르게 비공식석상에서 흉노족, 홍어족...등등

이런 은밀하고도 무지몽매한 말들이 오가면서 갈등에 갈등만 더해가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전인 2009년 경주 동부동의 어느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부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비의 내용 일부가

신라의 김씨 왕가들은 흉노태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데 중국과 서양의 역사에서 흉노족은 무자비한 야만인,

또는 정복국가로서 잔인무도한 오랑캐라 기록되긴 하였지만

기원전 8~9세기부터 서기 200년대까지 천년세월동안 동북아시아는 물론

페르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중앙 아시아까지 진출하였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용맹하였다는 부족 독일의 게르만족까지 36계 출행랑을 놓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로마의 서쪽까지 깊숙이 진출하여

동서무역의 실크로드길을 세계 최초로 닦아 놓았던 나라였던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그런데도 지금현재 한국의 어느 특정지역에서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일부의 사람들은 꼭 이렇게 말을 한다

 

역시 흉노의 후예들은 다 흉악해....

오호~ 홍어족들 하는짓거리들이 다 그렇지 머...

 

이런말들을 여과없이 그냥 막 내 던지는 사람들은 분명

흉노보다 더 무지막지하고 홍어보다 더 치졸하고 졸렬한 사람들이 아닐까...?

 

이견대서 바라본 봉길해수욕장과 문무대왕릉

 

위에서 2009년 새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에 신라의 김씨 왕가들은

흉노태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언급을 했는데...

그렇다면 김일제는 과연 누구인가 ?

 

이곳저곳 검색을 한 결과 다음백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김일제(기원전 134년~86년)는 한나라의 제후로 흉노족 출신이다

자는 옹숙(翁叔)이고 시호는 경후(敬侯)이다. 본래 흉노의 번왕인 휴도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4세에 부왕이 무제(武帝)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왔다

그후 한무제의 신임을 받아 한나라 관료로 일하면서 김씨(金氏) 성을 하사 받았다

말년에 투정후(秺亭侯),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김일제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김씨로 중국김씨의 시조이다. 한국의 김씨 역시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하 생략.....

 

중국은 지금 각종 역사공정을 통해 주변국가의 역사를

자국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작업이 한창이다

 

몽골에 이어 티벳, 신장 위구르족, 흉노와 몽골의 징기스칸은 물론

한국 고대사까지 싸악 잡아돌리면서 신라의 역사까지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그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

 

단순히 자신들 과거의 저력을 과시하려 함일까 ?

아닐것이다. 유사시 어느지역에 분쟁이 일어났을경우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듯

그들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신들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정당성을 들고 나올것이다

 

이견대서 바라본 봉길해수욕장과 문무대왕릉

 

신라왕조실록엔 박혁거세가 기원전 50년경에 신라의 제 1대왕으로 등극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데 중국의 역사기록에서 확인되었다는 신라 김씨의 시조라고 주장되는 김일제는
박혁거세보다도 100년이나 앞선 기원전 150년경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들이 신라로 슬그머니 잠입하여 신라의 왕족이 되었을까 ?

신라는 최초 박씨가 집권하여 박씨, 석씨가 번갈아가며 집권하다가

서기 3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김씨가 집권한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배척했던 흉노 휴도왕의 장남 김일제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2~3백년 거주했다고 중국인이라고 말을 한다면 한국에서 2천년을 거주한 중국계 김씨들은 

과연 어느나라 사람들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가 ?

 

그런 논리라면 중국의 조상이나 김씨의 조상들은 네안데르텔인이나 바퀴벌레,

아니면 아메바같은곳에서 찾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

 

이견대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기록에는 신라건국 시조는 박혁거세 기원전 69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 신라의 고대 유물들을 보면 금으로 된 장신구가 백제와 고구려보다 훨씬 많았고

말을 탄 사람들의 콧빼기는 서양아시아 사람과도 같았고

말의 장신구도 이국적인 폐르시아나 실크로드에서나 볼수 있을법한

화려한 금동 장신구가 많은것 같다

 

그렇다면 김씨는 그렇다치고 박씨와 석씨의 출처는 과연 어디였을까 ?

그냥 이름은 실크로드의 중앙 아시아 비슷한 이름이고

성씨만 박씨로 살째기 이름앞에 슬그머니 내어 놓았던것일까 ?

거기까지 내는 모른다

다만 기록되어 있는 신라 천년 왕조들을 여기에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본다

 

신라건국 시조 1대왕 박혁거세 BC 69~4

그로부터 약 100년후인 서기 80년경에 와서는 왕의 성씨가 갑자기 박씨에서 석씨로 바뀐다

신라 4대왕 성은 석씨 이름은 토해(탈해)라고...

그리고 5대왕부터는 다시또 박씨로 쭈욱 나가다가

서기 200백년경 석탈해가 죽은지 약 100년만에 또다시 9대왕 석씨가 집권

서기 200년대 후반경 에 와서는 길알지의 후손이라는 13대왕 김미추가 집권

김씨가 왕노릇을 약 20년정도 빤짝 해먹은 후,

14대왕은 또다시 석씨(석유례)가 집권, 쭈욱 왕위를 지키다가

서기 30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야 김씨가 17대 왕위에 올라

비로소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되야부렸다

 

이후 김씨는 길이길이 계속 집권 600년대 중반 27대 선덕,

28대 진덕이라는 두 여왕의 여인천하시대를 거쳐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다졌던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리고 삼국을 통일시켜 신라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는 문무왕은

지금 현재 저 수중릉에 유골이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수중릉에 안치 되었다는 30대 문무왕과

감은사를 완공시켰다는 그의 아들 신문왕으로해서

그런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나가다

800년대 후반 51대왕 진성여왕때부터 반란,반역,음모,술수가 도처에서 난립하기 시작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까지 가세 신라는 그때부터 국운이 기울어가는 징조를 보였고

급기야 900년대 초반 55대 경애왕에 이르러서는 변방을 지키던 장군과 군사들

이놈저놈 저놈이놈 몽땅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후백제의 수장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

경애왕을 자살시키고 신라 궁궐은 그야말로 노략질천하가 되면서

900년대 중반 56대 경순왕에 이르러 찬란히 빛나던 신라 천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어따

 

이견대서 바라본 봉길해수욕장과 문무대왕릉 - 경주시 양북면

 

문무왕릉을 품고 있는 봉길해수욕장은 8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해변에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는 횟집들과 식당들도 잠시 휴식에 들어간듯 하다

1,300년전 이곳에 왜구들이 출몰하여 노략질을 한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그야말로 먼 옛날에나 볼수 있을법한 포근하고 평화롭기만 한 봉길해변이었다

  

이견대서 바라본 봉길해수욕장

 

이견대

 

이견대

 

이견대 안내문판

 

이견대의 이력에대하여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견대 안내문판을 참고 하시길...

 

신문왕이 완공했다는 경주 감은사 절터 - 경주시 양북면

 

바로 그곳, 문무왕릉과 봉길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견대에서

나즈막한 산허리를 휘돌아 자동차로 약 5~6분정도 달려오니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완성했다는 감은사지가 보였다

 

감은사지 앞 나즈막한 골짜로는 이곳이 바닷가 마을이라고 보기 힘들정도로

제법 너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곡창지대 평야를 보는듯 했고

감은사지 뒷편 산기슭에는 화전으로 보이는 농가들 5~6가구가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었다

 

신문왕이 완공했다는 경주 감은사 절터 - 경주시 양북면  

 

바로 저거야 !

내가 예전부터 한 번 꼭 보고 싶었던 탑 ! 감은사지 쌍탑 !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도야쥐털 카메라를 꺼내들고 감은사지 쌍탑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우리일행중 누군가 빵을 한 보따리 사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종이빽에서 빵을 꺼내 들더니 나보고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다 먹자고 하는짓인데 허겁지겁 돌아보지 말고 먹으면서 천천이 돌아보라구...이 ?

해서 빵을 받아들고보니 포장지에는 신라명과 경주빵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옛절터 감은사지에서 신라의 명과라는 경주빵을 우걱우걱 쩝쩝...

이렇게 먹으면서 돌아보니 글씨 혓바닥만 조금 달착지근한 느낌이었지

1300년전 절집 감은사하고는 전혀 무관한 느낌이었다

 

저 감은사를 시공한 문무왕과 완공한 신문왕이 지금 내가 먹고 있던 신라의 명과

경주빵을 드시면서 공사현장을 돌아보았다면 또 필이 열배 백배 와 닿을른지도 모르겠다

 

감은사지 쌍 석탑

 

그동안 충청도 일대의 둥글넓적하고 펑퍼짐한 탑만 보다가 

 이렇게 각이 딱 잡힌 탑을 보니 위장대의 매끄러운 옷깃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다리미질로 각을 딱딱 잡아놓은 위장대의 위엄있는 복장과도 같은 느낌

바라보는 사람들을 앞도하듯이 내려다 보는 저 근엄한 감은사지 석탑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던 문무왕의 혼신과도 같아 보인다

 

바로 이거였던가 ?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수 있었던 저력이.....?

각이 따악 잡힌 힘찬 기세로 뽀쭉 솟은 저 탑신들...

마치 정복자 문무왕과 신문왕이 용맹한 신라의 군사들을 위엄있게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한데 내가 살고 있는 충청도의 탑들과 불상들의 표정은

석굴암 돌부처럼 위엄있지도 않고 감은사 쌍탑처럼 각이 딱 잡혀있지도 않다

그저 옆집 할망구의 푸짐하고 넉넉한 표정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나라를 보존치 못하고 패망은 했지만

어딘가 엉성해보이고 어수룩해보이는 그 표정에서 연민의 정이 표출될것 같은 느낌...

내가 목이 컬컬해질때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 사발 내어 줄것 같은

인심좋은 옆집 할망구의 푸짐하고 넉넉한 그 표정...

이곳 감은사지에 서서 나는 그런 표정들을 잠시 상상해봤다

 

내가 이곳 감은사지에서 충청도의 펑퍼짐한 탑들과 불상들을 떠올려본 이유는 

저 힘차게 쭈욱 뻗은 쌍탑의 힘찬 기세에 잠시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보는 사람들을 앞도하는 기세로 힘차게 쭈욱 뻗은 감은사지 석탑

 

각이 따악 잡힌 위장대의 사열처럼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감은사지 쌍 돌탑

 

감은사지 3층석탑은 신문왕 2년, 682년에 완공된 탑으로서

축조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 감은사지 3층석탑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은 많지만 1300년의 세월을 감안한다면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해 보인다

 

130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감은사지 3층석탑

 

1300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감은사지 3층석탑

 

기세좋게 뻗어 올라간 감은사지 3층석탑

 

감은사지 옛 절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놓았던 문무왕은 수도 경주로 통하는 동해 바닷가 부근에

절을 짓고자 했으나 680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기리어 682년, 2년만에 절집을 완성하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뜻으로 절집 이름을 감은사라고 하였다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어 이곳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신문왕은 감은사 구들장 초석 한귀퉁이에 용이 드나들수 있게끔 이렇게 틈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감은사지 구들장 초석

동쪽바다를 향해 구멍을 뚫어놓은 이유는

수시로 노략질을 일삼는 왜놈들을 박멸하기 위함이었다 함

 

감은사지 옛 절터와 감은사 삼층석탑

 

1300년전에 완공되었다는 감은사는 지금 모두 소실되고 감은사 삼층 쌍돌탑과 
 석조물의 흔적들만이 1300전에 이곳에 큰 사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감은사지 옛 절터와 감은사 삼층석탑 - 경주시 양북면

 

문무왕의 수중왕릉 대왕암이 있는 봉길해수욕장은 8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한산한 모습이었고

이곳도 몇몇 답사객들을 제외하고는 마을사람들은 눈에 뛰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전, 저 돌을 깍았던 신라석공들의 고단한 망치질 소리와

봉길해변 대왕암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가까이서 들려오는듯 한다

그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였으며 또 어느곳에서 어느생을 살다가 한세상 삶을 마감했을까 ?

사뭇 궁금해지는 풍경들이다

 

경주 감은사지 안내문판

 

Kitaro - 사주지로∼흑수성의 환상 (Silver Moon)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출처 : 비단장수 왕서방 이야기
글쓴이 : 비단장수왕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