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76

메모리얼 데이

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현충일, 마음 차분해지는 아침이다. 동작동으로 참배가기로 한 날이다. 어제 통화했던 아버지의 음성이 부쩍 힘없어 보였다. 기력이 부쳐 당신은 못 갈 것 같다고 무척 아쉬워하셨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럼 저 혼자 다녀올 테니 얼른 기운 차리시라며 통화를 마쳤다. 남양주에서 동작동 현충원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해마다 다녀가셨는데 이젠 건강이 허락지 않아 그마저도 버거우신가보다. TV로 추모식 중계를 시청한 후 집을 나섰다. 그 사이 내리던 비는 그치고 날이 청명해졌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적함을 떨친다. 일 년에 한번 추모객들로 북적이는 동작역 국립현충원 방향 4번 출구 현수막을 크게 붙여 이정표를 대신했다. 사람들에 섞여 육교를 건너는..

수필 2022.06.09

충혼비로 만난 큰아버지

여름 재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아버지는 동작동 현충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해마다 유월이면 친정아버지는 이곳을 다녀가시곤 했다. 지금은 성년이 된 어린 장조카의 손을 잡고서 혹시나 하고 전사한 형님의 이름자를 찾으러 다니신 것이다. 바로 위의 형님은 6.25 전쟁 때 이병의 신분으로 전사하셨다. 아버지 나이 열네 살에 헤어져 가슴에 묻힌 형님. 여태 유해조차 찾지 못한 채 함자라도 찾을 수 있을까 매년 기념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살펴 오신 것이다. 오랜 정성이 통했는지 몇 해 전 형님의 존함이 새겨진 비문의 위치를 찾으셨다. 얼마나 반갑고 비통했을까. 스무 살 갓 넘은 청년이었던 형님을 팔순이 다 된 아우가 만난 그때의 심정이. 명절날 그 이야기를 들려주실 적에 가슴 먹먹해..

수필 2022.06.02

봄을 기다리는 나목

그는 전차 끊어진 밤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던 슬픈 눈의 화가였다. 미군 피엑스 초상화부의 옥희도 씨가 며칠 째 나오지 않았다. 명동에서 창신동까지 화가의 집을 찾아갔던 주인공의 이야기를 박완서님은 소설 나목에서 묘사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방 한 켠 빼곡히 세워진 그림들 사이 캔버스 위 미완의 그림 한 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잎새 모두 져버린 한겨울 고목이었다. 박완서 님은 소설가 지망생 시기 박수근 화백과 전후 한 공간에서 일했던 실제 이야기를 소설 나목으로 엮어 여성동아 공모에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여고 입학 무렵 학교 신문 숙란에 선배인 박완서 님의 그 소설이 연재되고 있었다. 설렘으로 선망하며 읽었던 앳된 기억. 소설 나목의 결말은 미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대화가 옥 선생의 유작전..

수필 2022.02.28

24시 편의점 두 번 째 이야기

늦은 밤 고단한 퇴근길이다. 평범한 일상이 멈춰선지 오래인 나날. 애쓰고 노력해도 내 힘만으론 어쩔 수 없는 고달픔이 이어지고 있다. 겨울 속에 봄이 있다 했으니 몸과 마음 따뜻한 봄날이 어서 찾아오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옮긴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24시 편의점이 있다. 항상 지나쳐가는 우리편의점. 두어 해 전까지 노부부 내외가 가게를 지키던 곳인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드님이 물려받은 듯했다. 두 내외분의 온화한 모습처럼 말끔하던 가게는 이전보다 다소 어수선해진 느낌이다. 상품도 뒤죽박죽 섞이고 청결도 그전만 못해 보이니 내 기분 탓인가. 24시 우리편의점은, 신도시 큰 상가들 틈 사이에 낀, 편의점이라곤 하지만 예전 동네 구멍가게를 연상시키는 협소한 점포다. 규모 있게 잘 관리..

수필 2022.02.09

24시 편의점

이틀 째 문이 닫혀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대형 마트와 유명 편의점 사이에 낀 우리편의점은 24시간 운영하는 동네 작은 구멍가게다. 근처 마트를 주로 이용하기에 평소 우리편의점에서 구입하는 물품은 별로 없다. 간혹 퇴근길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주전부리나 아이스크림을 몇 번 샀던 게 전부다. 늦은 밤 가게를 지키는 건 대부분 노인 부부였다. 번갈아가며 불침번을 서는 건지 어떤 날은 바깥어른이 계시고 어떤 날은 안주인이 계셨다. 건장한 젊은이들도 버티기 힘든 밤샘 일을 두 노인이 감당하는 걸 보며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마음 숙연해지곤 했다. 얼마 전 퇴근길에 아이스콘 몇 개를 사고 셈을 치르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인상 좋은 젊은이가 계산대에 있었다.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인가? 갸웃거리며 거스름..

수필 2020.10.13

어느 여름의 추억

새벽 2시쯤이나 되었나 보다. 한밤중 다급한 목소리가 직직거리는 확성기를 통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무딘 감각이더라도 그 소리엔 화들짝 놀라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긴박한 상황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급류로 불어난 계곡물이 텐트 앞까지 차올랐다. 가벼운 알루미늄 코펠이 물살에 흔들리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간밤에 별다른 주의 방송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쏟아진 폭우로 계곡물이 불어난 모양이다. 다급히 짐을 챙겨 도로 위쪽으로 피신했다. 아닌 밤의 홍두깨 같은 단양 상선암계곡에서의 소싯적 추억이다. 계곡 상류라곤 하지만 장마철 물가에 텐트를 친 게 불찰이었다. 정신없이 짐을 옮기곤 비 맞은 생쥐가 되어 한참동안을 오소소 떨며 앉았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캠핑객들의 짐들로..

수필 2019.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