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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 /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 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떨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 나무 이재무 시인 갖은 루머와 가십으로 힘든 일 겪고 난 잘 나가던 한 연예인이 시시비비 다 가리고 상황이 종료된 후 절실히 느낀 바가 있다고 토로했다. 모든 게 다 끝나고 나니 주위 사람들이 저절로 정리되더라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잎 무성한 푸른 여름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다가 시린 겨울이 오면 제 갈 길 찾아가는 것처럼. 외로워서 더욱 단단해진 나무가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는 계절 겨울이다.

2023.11.11

추석 / 김연식

보고 싶지 않던 그 달이 한가위 돼서야 궁금하여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머님 세상 떠나신 후 돌아가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마을 어귀에 한결같이 자식이 언제 오나 기다리던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야 아, 외마디 외로움이 뼛속까지 전해졌습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도 방문을 열고 거실을 둘러 보아도 병든 몸 벽에 의지하며 반겨주시던 어머님은 숨바꼭질하는가? 이곳저곳 찾아봐도 계시지를 않았습니다 고향 큰형님과 형수님만 왔는가 동생 내려오느라 고생했네 반겨 주십니다 새벽에 찬 이슬은 온마을 삼키고 먼 앞동산 꼭대기만 어슴푸레 남겨 놓았습니다 버릇처럼 일어나 마을 이곳저곳 어머니 그림자만 찾아다녔습니다 사무치게 어머님의 목소리가 그리웠습니다 아들 왔어 그러던 그 목소리 동이 트면 상을 차려 인..

2023.09.27

흰구름 먹구름 / 딕 훼밀리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만난 것도 인연인데 마지막으로 보는 당신 왜 이다지도 괴로울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말 한마디 구름처럼 흘러간 옛 이야기인가 넓고도 좁은 길 어이가라고 너 홀로 둥실둥실 떠나가려나 말해다오 말을 해다오 구름아 너의 갈 곳 어디 넓고도 좁은 길 어이가라고 너 홀로 둥실둥실 떠나가려나 말해다오 말을 해다오 구름아 너의 갈 곳 어디 딕 훼밀리의 노래 흰구름 먹구름이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공동 옛날 다방에 앉아 그 노랠 듣던 그 순간은 온통 세상이 비애 자체로 보였다. 갓 스무살, 슬픔을 알기엔 참 이른 나이였는데도 그 아이와 나는 이 노랠 들으며 왜 그토록 슬펐던 걸까. 만남과 헤어짐의 슬픔을 너무 앞질러 공감했던 건 아닐지. 지나고보면 그처럼 어이 없는 시간도 추억이란 ..

2022.02.08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ㅡ박인환 한때 시, 목마와 숙녀 페시미즘의 시인 박인환에 열광할 때가 있었다. 사실 더 이상 꿈꿀 게 없었던 그때도 지금보단 더 희망적이진 않았을까.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는 위안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이 시간. 시간의 압박만큼 절대 절명인 건 없으니 더 이상의 페시미즘도 소용 없으니.

2022.02.04

송년의 노래 / 홍수희

늘 먼저 떠나는 너는 알지 못하리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보내야만 하는 이의 고독한 가슴을 바람에 잉잉대는 전신주처럼 흰 겨울을 온몸에 휘감고 서서 금방이라도 싸락눈이 내릴 것 같은 차가운 하늘일랑 온통 머리에 이고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리고 섰는 송년의 밤이여, 시작은 언제나 비장하여라! - 홍수희시인, 송년의 노래 누구라도 한번쯤은 비장해지는 시간 송년이다. 떠나간 어느 한해가 만족스러울 리 있을까마는 올 한해는 유난히 더 아쉬움과 회한 가득한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해마다 맞는 송년의 의미는 모든 지나간 것들을 소각하고 잊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새날 새 마음으로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 송년의 경계엔 또 새로운 날의 시작이 맞물려 있다. 다시 힘차게 희망의 새해를 Happy New Year!!

2020.12.31

브라보 유어 라이프

전철역 홈 스크린도어에 비친 두루뭉실한 내 몸과 맘 세상 풍파에 많이도 둥글어졌다 깜빡 졸다 지나쳐버린 두 정거장은 잃어버린 꿈처럼 아득히 멀기만하다 가야할 길은 멀고 내가 탈 전철은 금방 막차 그 와중에 인정머리 없는 나무의자에 축 늘어진 젊은이 하나 애처럽게 눈에 든다 오늘 하루 무척이나 지쳤나보다 흔들어 깨워볼까 망설이다 못내 외면한다 살아감은 각자의 몫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 브라보 유어 라이프 세상 모두의 건투를 빈다

2020.10.12

도락산 바람 한자락

도락산 바람 한자락 소식 담아 너에게 보낸다 사인암 지나 선암계곡 상선암 맑은 물은 스물 여섯의 여름 나를 기억할까 세상 휘휘 돌며 발길 닿은 그 길 위에 추억 하나씩 묻혀있다 장마 끝에 끊어진 국도 위 막막하던 청춘의 더딘 발걸음 단양의 옛 길은 이미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너에게 도락산 바람 한자락 안부 담아 소식 보낸다 그때는 참 풋풋해서 좋았다고

2019.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