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 씨. 장좌리 별신굿 보존회장이기도 한 그는 부용산을 되찾기 위해 호주까지 쳐들어 갔다 온 열혈 부용산 노래 지킴이다.
벌교 주민들의 ‘부용산’에 대한 사랑은 용광로보다 뜨겁다. 노랫말이 1절밖에 없어 아쉬운 나머지 박 시인에게 청을 넣어 2절 노랫말까지 근사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지금의 2절 가사는 원곡보다 수십 년 뒤에 추가로 지어진 것이다. 주민은 성금을 걷어 벌교 뒷산 부용산 오솔길에 큼지막하게 화강암으로 노래비를 세우고 내친김에 산책로까지 조성했다.
그러나 벌교는 노래 ‘부용산’보다는 소설 ‘태백산맥’으로 친숙하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벌교이다 보니 벌교 곳곳에는 ‘태백산맥’의 흔적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토벌대가 공짜로 머물던 남도여관(당시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나 지역 계엄사령관의 취임식 때마다 열병과 분열식이 벌어졌던 벌교 남초등학교 등이 여전히 역사를 증거한다. 남도여관을 뒤로하고 자그마하게 서 있는 산이 부용산이다. 말이 산이지 해발 192m에 불과한 동네 뒷산이다. 그렇지만 벌교 사람들에게 부용산은 정신적인 지주다. 행정관청과 번영회가 힘을 합쳐 조성해 놓은 ‘부용산 시오리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부용산 노래비가 찾는 이를 반긴다. 이쯤 되면 외지인들은 ‘부용산’을 벌교의 노래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해마다 벌교꼬막축제에서 부용산을 부르는 지역 주민 안택조(65) 씨는 “목포는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도 있고 ‘목포는 항구다’도 있는데 왜 벌교의 노래 ‘부용산’까지 탐내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안씨는 지역 국회의원이자 경원대, 호남대 총장을 역임한 이대순(82) 씨와 더불어 20여 년 전 호주까지 ‘쳐들어가’ 박기동 시인으로부터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구술 증언을 확보해온 ‘부용산’의 열혈 지킴이다.
벌교의 노래 ‘부용산’
이쯤해서 부용산을 모르는 사람은 유튜브나 스마트폰을 통해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vXq3x4hz9gM) 노래는 지나치게 처연하고 넘치게 아름답다. 애상이 가슴을 꾹꾹 찌르고 있지만 깊고 그윽한 격조를 유지한다. 굳이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슬프지만 겉으로는 결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남루하지 않다. 일찍이 소월이 자신의 시 ‘진달래꽃’에서 강조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 여수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문득 “벌교 가면 ‘부용산’ 빼고는 노래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무섭다는 벌교 주먹이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이다. 그래서 슬픈 노래 ‘부용산’을 들으면 여름은 더욱 외롭다. 맞다, 그리움 강이 되어 맴돌아 흐르고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꿈도 간 데 없다. 벌교 부용산 저 멀리엔 재를 넘는 석양만이 홀로 섰고 병든 장미는 뙤약볕에 시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