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느 여름의 추억

정진숙 2019. 6. 22. 11:48

새벽 2시쯤이나 되었나 보다. 한밤중 다급한 목소리가 직직거리는 확성기를 통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무딘 감각이더라도 그 소리엔 화들짝 놀라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긴박한 상황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급류로 불어난 계곡물이 텐트 앞까지 차올랐다. 가벼운 알루미늄 코펠이 물살에 흔들리며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간밤에 별다른 주의 방송이 없었는데 순식간에 쏟아진 폭우로 계곡물이 불어난 모양이다. 다급히 짐을 챙겨 도로 위쪽으로 피신했다.

 

아닌 밤의 홍두깨 같은 단양 상선암계곡에서의 소싯적 추억이다. 계곡 상류라곤 하지만 장마철 물가에 텐트를 친 게 불찰이었다. 정신없이 짐을 옮기곤 비 맞은 생쥐가 되어 한참동안을 오소소 떨며 앉았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캠핑객들의 짐들로 도로 위는 이재민들의 집합소를 방불케 했다. 아찔했던 순간을 벗어나 한숨 돌리고 나니 몰골은 왜 그리 처량 맞고 우습던지.

 

아침 방송은 단양시내에서 사선암, 상선암으로 연결되는 차로가 유실되어 버스가 다니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국적인 큰 장마로 길이 끊긴 곳이 비일비재했다. 휴가 마지막 날인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떻게든 상경을 해야 되는데 그저 난감할 따름. 배낭을 꾸려 시외버스터미널을 향해 차도를 무턱대고 걷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도로와 산사태로 흙더미가 쏟아져 내린 길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어디까지인지 모를 길을 무작정 걸을 때의 막막함이라니. 자동차 한대 지나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차도 위를 한없이 걸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했던가. 몇 시간을 걸었는지 멀찌감치 단양시내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살았구나 싶은 안도감. 어떤 경로로 집에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던 도로 위를 맥 놓고 걷던 그날의 절박함은 너무도 생생하여 쉽게 잊혀 지질 않는다.

 

그때의 심경을 시 한편으로 써서 미니홈피에 올리고 가끔씩 들여다보며 추억하곤 했다. 그런데 한동안 무심하던 사이 홈피계정이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치열한 삶의 한 시기 잠시 소원했던 그때가 어찌나 안타깝고 속상하던지. 백 여 편이 넘는 글과 저장된 사진을 몽땅 날리고 너무나 황망했던 그때의 일이 아직도 아쉽기만 하다.

 

세월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많은 것들, 그중 간신히 남은 추억 몇 조각.그 몇 조각의 아련한 추억들이 지금의 팍팍한 삶을 푸근하고 살맛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고되었던, 때론 즐겁고 행복했던 지난 시간들이 현재의 나에게 문득문득 위로를 건네주곤 한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우정  (0) 2019.09.26
월정교, 신라의 밤을 걷다  (0) 2019.07.01
겨울이야기  (0) 2018.12.16
헌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며  (0) 2018.12.04
황매산 가는 길  (0) 2018.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