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천왕봉을 다녀 온 이들이 지리산의 벅찬 감흥이 좋았던지 반야봉 산행을 제안했다. 몇몇이 흔쾌히 동조하고 일정을 잡았다. 9월 2일 수원역에서 서울 발 22시 18분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출발한다. 밤기차로 떠나는 여행인지라 모두들 설렘으로 상기된 표정이다. 구례구역에 9월 3일 새벽 2시 20분에 도착했다. 첫 발을 딛는 역은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더불어 구수한 고향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미리 마중 나오신 J의 차로 일행은 성삼재로 향한다. 지리산의 울창함이 어두움 속에서도 위세 있게 드러나는 고개 길 성삼재,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길가의 이정표가 이채롭다. 차창을 열어 지리산 자락 천연의 공기를 마시며 구불구불 고개를 오른다.
성삼재에는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맞닿을 듯 지척에서 무수한 별들이 우리를 반긴다. 아스라이 먼 시절에 외던 오리온, 카시오페아, 안드로메다, 별들을 가까이 마주하기가 얼마만인가.
잠시 감상에 젖는 사이 한기가 든다. 재킷을 꺼내 입고 랜턴의 불을 의지하며 노고단대피소로 향한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는 3,8km 잘 닦인 길을 따라 걷는다. 어둠 속에서 이정표가 보였다. 천왕봉 25,9km 반야봉 5,9km 노고단고개 360m 드디어 산행 시작이다.
대피소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오르는 내내 수풀 사이로 맑고 투명한 별빛이 길을 비춘다. 하늘 한번 땅 한번, 목가적인 별의 여운을 잠시라도 더 붙잡으려니 발걸음이 더디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서둘러야 하는데 속도가 붙질 않는다.
임걸령으로 오르는 길은 능선길이라 수월하여도 기차여행에 잠을 설친 까닭인지 힘들어 한다. 5시가 넘어서자 조금씩 여명이 밝아오고 하늘빛이 짙은 코발트색으로 변하고 있다. 금방 해가 뜰 거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숲길을 한참 지나 돼지평전에 닿았다. 뿌연 운무 사이로 야생의 풀들이 바람에 날리고 능선 끝으로는 붉은 일출의 잔광 속에서 운해의 장관이 펼쳐진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탄성이 터진다. 조금 더 가면 임걸령에 더 좋은 경치가 있다는 J의 말은 아랑곳 않고 열심히 사진을 찍은 후에야 흥분을 가다듬고 바람 부는 돼지령의 쓸쓸한 여백을 뒤로 한 채 길을 잡는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펼쳐지는 장관, 산봉우리 사이로 수줍은 듯 피어 느리게 흐르는 구름의 환상이 우리를 넋 놓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구름은 여기 지리산에서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지리산 반야봉은 구름의 고향인 셈이다. 또 한 차례 사진을 위한 부산한 소동이 인다.
일출도 끝나고 걷느라 다소 지친 탓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단잠도 자고 준비한 복분자를 나눠 마신다. 임걸령에는 수량이 넉넉한 약수가 있다. 목을 충분히 축이고 물통에 가득 약수를 담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노루목에서 반야봉 1km, 마지막 가파른 고개로 접어든다. 시간은 벌써 10시, 경치에 도취되어 사진을 찍느라 예상보다 많이 소요되었다. 아까 마신 복분자가 위력을 발휘해서인지 힘이 나는데 다른 분들은 많이 힘들어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인데 기운내시길.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보니 철 계단이 나타난다. 드디어 반야봉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잘 정리 된 돌길을 밟으며 오르노라면 이름 모를 들꽃과 풀들이 바람에 살랑이 반긴다.
하늘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구름을 벗 삼아 오른 지리산 반야봉 1732m, 발아래 수많은 봉우리가 펼쳐져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품어 준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한낮을 뜨겁게 달구고 산허리에 잠겨 있던 구름도 하늘 위에 높이 떠올라 새벽과는 다른 그림을 보이고 있다. 이 멋진 풍광을 어찌 잊을까.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노고단으로 하산을 준비한다. 두 시간 남짓이면 족할 거 같은데 지친 분들이 있어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보는 돼지령은 첫 새벽의 쓸쓸함은 간데없고 밝은 햇살 아래 들풀의 반짝이는 흔들림이 상쾌하다. 이렇듯 자연의 색이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달리하는데 하물며 변하기 쉬운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랴.
노고단은 구름의 멋진 파노라마를 배경으로 서있다. 노고단 고개에서 정상까지는 10여분이면 가능하다. 두 곳 모두 돌무더기로 된 조형물이 있고 정상까지는 훼손을 막기 위해 나무데크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정상에 서면 지나 온 반야봉과 천왕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서 섬진강의 물길이 언뜻 보인다. 뒤를 돌아 서면 순천의 백운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시야에 머물고 넓게 펼쳐지는 능선의 조망이 더없이 장쾌하다.
가슴이 탁 트이는 노고단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산행은 끝이 난다. 성삼재를 향해 가는 동안 벅찬 감흥과 아쉬움이 서로 교차한다. 멀리 보이는 구례시가를 사진으로 담고 차창으로 스치는 성삼재의 깊은 계곡을 눈으로 담으며 구례로 향한다.
섬진강은 재첩이 유명하다. 구례구역 못미처의 식당에서 재첩국과 동동주 도토리묵 파전을 주문하고 늦은 점심을 청한다. 역시 전라도 음식은 제대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나물이 특히 맛있고 재첩국의 담백함과 도토리묵의 깊은 맛이 좋다. 동동주인 줄 알았는데 모리미주라는 담근 술은 뒷맛이 구수한 게 뭔가 특별하다. 전라도의 넉넉한 인심으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일어선다.
구례는 지리산의 넓은 품에 감싸여 포근하게 자리하고 있는 고장이다. 섬진강을 가로 지르는 긴 돌다리를 지나 강을 마주하고 서 있는 구례구역은 이름은 구례지만 행정구역상으로 순천에 있다. 그래서 구례로 가는 입구라는 의미로 구를 붙여서 구례구역이라고 명하였다한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하였을 사연 하나를 또 읽고 간다.
모든 여행은 어찌 보면 소통을 위해서 인 거 같다. 산에 와서 자연과 소통하고 구례에 와서 이 땅과 소통하고 말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고 자연과 사람과 나를 소통하여 의미를 일구어 가는 것이 여행의 참 맛이다.
자신의 고장을 방문한 우리를 위해 종일 애써 주신 J에게 감사드린다. 명산의 호위를 사방에 받으며 멋지게 선 역을 뒤로 하고 여수 발 6시 20분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나의 터로 다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