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들 속에는 노곤한 우리 삶의 풍경을 맑고 풍성하게 어루만져 주는 치유의 힘이 있다. 힘든 날 돌아보게 되는 지난날들이 가끔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날 문득 홍차에 적신 쁘띠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무는 순간 아득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조우한다. 할머니의 찻잔에서 서서히 부풀어 피어나는 작은 꽃잎처럼 하나둘 환생하듯 되살아나는 콩브레의 마을길을 떠올리며 그는 일곱 편의 긴 대하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문장을 입안에 되 뇌이면 한참을 가슴 먹먹해진다. 내가 다닌 전농동로타리에 있는 여중학교의 풍경은, 두 채의 교사와 덩그러니 운동장 하나뿐인, 십대 소녀의 여린 감수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삭막했다. 왕복 4차선 대로변으로 난 교문 앞에는 육교가 있고 계단 바로 아래 우중중한 좁은 골목을 끼고 입구에 허름한 문방구가 있었다.
방과 후면 쪼르륵 달려가는 우리들의 참새방앗간 육교 문방구. 어두침침한 실내와는 달리 문구점 안은 늘 십대들의 발랄한 열기로 환하게 웅성거렸다. 버스회수권과 맞바꿔 먹던 떡볶이며 튀김, 꼬마김밥의 맛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왁자지껄한 문구점 안 선반 위에는 몇 안 되는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데미안, 적과 흑, 생의 한 가운데, 말테의 수기, 이방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필독서들이었다. 그 책들을 쳐다보며 침만 꼴깍꼴깍 삼키곤 했다. 이담에 돈 생기면 꼭 사서 봐야지 하면서 말이다. 지금처럼 도서관이 많은 시절도 아니고 살림이 넉넉한 때도 아니어서 그 책들을 읽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여고 진학 후 다행히 도서관이 있어 맘만 먹으면 쉽게 책을 볼 순 있었지만 프루스트의 책만큼은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 읽었다. 잠 못 드는 어느 밤, 한밤중에 읽기 시작해 새벽 다섯 시를 넘어서야 책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첫 장을 넘기며 단발머리의 앳된 나와 반갑게 만난 건 당연한 일이다. 밤을 꼬박 새우며 그가 이끄는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언젠가 완역되면 다 읽고 말리라는 다짐을 했었다. 한밤을 책읽기의 설렘으로 지새웠던 그때의 열정이 때로는 그리워진다.
당시에 이 책은 스완네 집 쪽으로라는 부제가 붙은 한편만 번역본으로 나와 있었다. 각각 독립된 한권의 소설로 읽어도 손색이 없는 이 대작은 소설로서는 프루스트가 유일하게 남긴 작품이다. 원고를 탈고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생명과 맞바꾼 그의 일대기라 할 수 있겠다. 프루스트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자전적인 소설은 그 후로도 한참만에야 완역되어 국일미디어에서 11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한권 두권 구입하여 이제는 내 재산목록으로 남은 책이다.
한권의 책을 사기까지 몇 번의 망설임을 가져야 할 만큼 팍팍한 날들을 살아온 기억이 간혹 아플 때도 있다. 게다가 11권 분량의 방대한 드라마에 비하면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넉넉한 시절로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일생은 유년의 시간과 기억들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지나간 날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오늘을 사는 내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추억이라는 긴 화두는 어쩌면 끝나지 않을 숙제일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와 같은 대가는 아니더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누구에게라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보듬고 쓰다듬으며,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가슴에 고이 담으며, 그렇게 삶의 끝까지 함께 갈 추억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언제라도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련다.
"갑자기 지난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날 아침 레오니 고모의 방으로 아침 인사를 갈 때 고모가 내놓는 홍차에 담근 쁘띠 마들렌의 맛이었다. 여태까지 그것을 보고도 실제로 맛을 보기 전까지 아무 것도 회상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 후 과자 가게 선반에 놓인 마들렌을 몇 번이나 보고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심상이 다른 나날들과 이어져 있었거나 그처럼 오랫동안 바깥에 내던져진 기억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분해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형태 또한 풍만하고 육감적인 과자의 작은 조가비 형태가 사라져 버리거나 잠들어 버리거나 하여, 의식에 또다시 결부될 만한 장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옛 과거에서, 인간의 사망 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면 냄새와 맛은 보다 연약하게, 보다 뿌리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 없이 영혼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폐허 위에 환기시키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거의 감지되지 않는 냄새와 맛의 이슬방울 위에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