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강의는 별도
소설 지망생들에게
소설을 쓰기로 작심한 여러분들에게 먼저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나는 이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져보라고.
그렇다. 여러분들은 코가 두 개일 수도 있고, 눈이 하나일 수도 있고, 이마에 뿔이 날 수도 있는 색다른 존재이어야 한다. 내가 이처럼 비논리적인 말로 첫마디를 장식하는 것은 문학적 언어에 익숙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체질부터 바꿔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논리, 타당, 절대, 규범, 습관 등이 굳어진 과학적 체질에서 느낌, 꿈, 환상, 신비, 상상 등이 육화된 감성적 체질로 바꿔야 제대로 문장력을 기를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작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아폴론적 즉 이성적 체질이라면 후자는 디오니소스적 즉 감성적인 체질인데 창작에서는 그 감성적(도취적) 체질이 필수적이다. 문학적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체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유의지
여러분은 이제 문창과 학생이 된 이상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는 좀 별나야 한다. 연애도 별나게 해야 한다. 몸에 밴 고정관념을 철저히 깨야 한다. 습관을 때로 여길 만큼 참신해져야 한다. 심지어 생활인의 가장 귀중한 덕목인 도덕규범마저 때로 여길 만큼 자유의지에 젖어야 한다. 타락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래야 사물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다. 사물을 새로운 각도로 보는 시각의 독창성을 통해서 창조의 눈을 열 수 있고, 자기 자신마저 객관적 시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관이나 가치관도 바뀌어야 한다. 나는 소설 <악마의 원형을 찾아서>에서 이 세계를 선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악의 개념으로 본다면 허무가 극복될 것이라고 썼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여겨봐라. 누가 오래 살고 싶어 안달할 것인가.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행복이란 말에서 거부감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 의도적인 몸부림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작가정신이랄 수 있다. 나는 내 장편소설 <인간의 시간> 작가의 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기를 바란다’ 고 썼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죽기를 바란다는 말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한적인 고통을 체험한다는 의미일 텐데 그런 외상(trauma)은 창작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일부러 불행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절대가치에 대항하려는 모험, 그리고 그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의지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행복을 부정하려는 그 모험이 더 큰 행복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모험이 나를 파멸시킨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내 작가의식은 그 파멸마저 즐길 테니까.
반역정신
순질이화(馴質異化) 이질순화(異質馴化)란 말이 있다. 사물을 완전히 다르게,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시인 슈클로프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도 언어파괴라는 본래의 의미를 확대해석하면 그와 일맥상통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소설창작은 창조행위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 창작에서는 상식을 거부하려는 반역정신이 미덕으로 평가될 수 있다. 비판적 의식구조야 말로 진정한 창작정신이 아니겠는가.
톨스토이의 작품(묘사)에서 영향을 받은 슈클로프스키는 예술을 생활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대상들을 느끼기 위하여, 정말 돌이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우리에게 고마움을 주는 공기나 물이나 햇볕 같은 우리 주변에 편재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동화’ 되어 있기에 망각되므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 감각을 생생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또 골드만은 루카치의 개념을 적용하여 소설을 문제적 인물이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서사양식이라고 정의했는데, 예술가는 사용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므로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타락한 사회에서 그와 대립하는 문제적 개인이 되며, 그가 창조한 주인공은 문제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의 기억을 왜곡시키는 인식의 자동화에 대한 반역이 예술이고,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타락한 사회에 반역하는 문제적인 개인이 예술가이듯, 반역정신은 진실(주변 것들의 고마움)이나 조화로운 삶(사용가치)을 추구하는 길잡이 역할을 담당한다.
반역은 휴머니즘을 옹호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일이다. 얼굴에 큰 혹이 달린 처녀가 지리산 속에 혼자 숨어살았는데 어느 영화제작사에서 그 ‘괴처녀’를 특별출연시킨 적이 있었다. 스크린에 그녀의 귀신처럼 생긴 모습이 비칠 때마다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만약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 처녀처럼 얼굴이 흉물스럽게 생겼다면 아마 우리들 정상인들의 얼굴이 귀신 얼굴처럼 무서워 보였을 거라고.
이처럼 나는 내 의식과 정서를 뒤틀려고 노력했다. 사물을 삐딱하게 보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했다. 그럴듯한 교양태를 보면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점점 원시 상태로 퇴보하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또 원시세계에서 일시에 첨단세계로 비약하는 그 느닷없음에서 황홀경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자본주의에 취해 살면서도 그 제도를 절대제도로 신념하진 않는다. 사회주의는 그 변증법적 대응장치로서 아직 유효하다. 나는 그처럼 나를 썩지 않도록 흔들어댄다. 고여 있는 나는 고여 있는 물처럼 썩게 마련이다.
낯선 언어
소설은 언어를 통한 현실의 적극적인 반영인 동시에 감동을 전제로 한 예술품이다. 그런데 언어는 반복 사용함으로써 일상화되어 참신성을 잃게 된다. 때문에 일상어를 파괴하여 신선한 언어로 대체함으로써만이 감동유발이 가능한 문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런 언어를 살아있는 언어 또는 열린언어라고 하는데 열린언어는 상상이 필요한 언어를 말한다.
문예이론가 필립 휠라이트는 언어를 닫힌언어, 열린언어, 긴장언어 등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닫힌언어는 우리네 일상 언어처럼 한 가지 의미로만 정확히 통용되는 언어이다. 이에 비해 열린언어는 의미를 초월하여 앎에 대한 열망으로 또다른 의미를 창조하는 언어이나 통용되기 힘들다. 긴장언어는 닫힌 언어의 통용성과 열린 언어의 창조성을 모두 간직한 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언어, 즉 문학적 언어가 된다. 때문에 소설가는 열린언어적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되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긴장언어를 사용해야 될 것이다.
분꽃 그 작은 대롱 속에 들어갔으면....
우주의 직경을 재면 명주실로 몇 타래나 될까?
이런 언어는 상상, 즉 생각을 되씹어야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죽어있는 언어(닫힌언어)는 상상이 필요없는 언어이다.
너는 신용을 지키며 사는 인간이 되라.
열에 다섯을 더하면 열다섯이다.
이런 언어는 상상하지 않고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들이다. 요컨대 상상이 필요없는 언어는 신선하지 않다는 말이다. 신선하다는 말은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랄 수 있는데, 신선한 언어야말로 사물의 의미나 이미지를 재구성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제주도 일출봉에 오를 때였다. 내 앞에는 갓 결혼한 신부로 보이는 여성 둘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가파른 산을 중턱쯤 오르니 아스라한 벼랑 위에 그녀들의 신랑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난간에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여성이 말했다.
“살짝 밀어줄까?”
싱싱한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떨어지면 죽어. 왜 위험한 데에 서 있어. 어서 비켜.” 그런 뜻의 반어적인 표현이었다. 의미전달 역시 고리타분한 장광설보다 훨씬 선명하고 인간다웠다.
지성주의
문학인은 지성인일 수밖에 없다. 지성을 거부하는 작가라면 이미 문학을 포기한 사람이다. 끼가 있다는 말은 작품을 꾸리는 재능 말고도 이미 지식을 탐내는 체질임이 증명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지적허욕을 높이 사주는 사람이다. 공연히 유식한 척하려는 타입의 인간. 품위 차원에서는 부정적일지 몰라도 배움에 대한 욕심은 학문에의 천착을 충동한다. 지식은 아무리 탐을 내도 욕심쟁이가 아니다. 유식떨다가 창피 좀 당하면 어떤가!
나는 중학생일 때부터 개똥철학자가 되었다. 방학 때 기차를 타고 귀향할 때도 예쁜 여학생보다 유식해 보이는 늙은이 곁에 자리를 잡고 유식한 척 떠들어댔다.
“내 사유를 방해하는 데는 대포가 필 요 없다. 파리 한 마리면 족하다. 그 말을 누가 했는지 아세요? 파스칼이란 사상가가 했거든요.”
“너 사상이 뭔지 아니?”
“몰라요.”
“그런데두 사상가란 말을 함부로 해?”
노신사가 계속 꼬집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저보고 개똥철학자라고 불러요.”
나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런 말을 해준다. 소설 지망생처럼 재밌는 팔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소설창작은 혼자 하는 일이니 제멋대로 읽고, 제멋대로 쓰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재미에 빠져봐라. 또 모든 일상에서 소설거리를 찾겠다고 관심을 가져봐라. 그동안 지나쳐버린 일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허접쓰레기들, 일테면 길거리의 간판, 허물어진 담벼락, 기울어진 전신주, 깨진 유리창, 망가진 자동차, 병든 가로수,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저마다 말을 트고 싶어 안달할 것이다.
여행을 해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시골 여행 중에 폐옥 한 채가 눈에 띄었다고 하자. 그냥 버려진 그 빈집이 이제는 말하는 생명체로 다가올 것이다. 처음 거기에 지어진 내력, 기쁘고 슬펐던 애환의 색깔, 빈집으로 버려지게 된 운명의 질곡 등, 폐옥은 그런 말을 털어놓고 싶어할 것이다. 일상의 눈에는 감지될 수 없는, 무생물의 피와 살을 볼 수 있는, 그 의식변화의 쾌락에 취해봐라.
다만 그런 허접쓰레기들에게 무슨 말을 시켜보고 무슨 말을 해줄지가 문제다. 사물을 보는 주체의 의식 수준에 따라 이야기의 질이 달라진다. 창작에 있어 체험과 사유까지를 포함한 넓고 깊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가벼워질 수밖에 없는 시대사조라 해도 작가는 무거움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선은 ‘개똥철학자’가 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철학이라는 말, 사상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자기 나름의 사유체계를 세우라는 말이다. 학교수업이나 독서 등을 통한 연역적인 학습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사유나 체험을 통한 귀납적인 체득으로 원리에 접근하려는 체질을 길러야 한다. 비록 주관적인 오류에 빠질 경우가 있다 해도 그런 오류는 학습을 통해 검증되고 수정될 수 있다.
하지만 학습만을 통한 지식은 기반이 약하다. 자신의 사유와 체험을 통해 진리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 외롭고 고단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여기에서 투쟁이란 말은 전투적 의미가 아니고 유희적 의미를 지닌다. 고뇌에 빠져 괴로워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 고뇌를 즐기라는 말이다. 다른 학생들이 춤과 미팅을 즐길 때 혼자 책상 앞에서 ‘골치아픈’ 사유에 빠진 자신의 별난 시간을 상상해보라. 환상의 세계를 꾸미거나 절대자를 만날 수 있는 초월적인 체질도 그 사유를 통해서만 재구성이 가능하다. 창작에서의 실험적인 시도 역시 거기에서 논리를 획득할 수 있고 작가주제도 거기에서 우러난다. 그처럼 차원 높은 형이상학과 대거리하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창작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걸고 혼자 도전하는 그 외로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실찾기
문학인생이란 바로 멋을 찾는 삶이다. 소설가는 멋이 있어야 한다. 그 멋이란 다름 아닌 진실된 인간형을 말한다. 모든 문예물은 감동유발에 그 존재의의가 있다. 소설은 독자를 감동시킬 때에야 문예창작의 교시적 기능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진실만이 감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게 문학의 본령이고 힘이다.
소설쓰기는 한마디로 진실을 다루는 작업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화두로 삼고 면벽정진하는 고뇌스런 삶이 소설쓰기이다. 양파껍질을 벗겨봐라. 알맹이가 없다. 그래도 알맹이를 찾아 껍질을 벗겨야 한다. 지구의 양파를 다 모아서라도 벗겨봐야 한다. 소설가는 이런 숨겨진 사실을 감득하는 직관력과 그것을 캐내는 천착력이 있어야 한다. 소설가가 사람을 겉으로만 보고 속에 들어있는 비리를 분석하지 못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 소설쓰기는 인간성 탐구가 아닌가.
진실을 찾으려면 우선 사람 볼 줄을 알아야한다. 모두가 칭찬하는 사람이라도 과연 칭찬받을 사람인지를 캐봐야 하고, 그와 반대로 매도당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매도당할 사람인지를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그처럼 진실은 찾기 힘든 것이니 작가는 세상을 넓고 깊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전지전능한 창조주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진실을 말하려면 자연히 타락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타락에 대한 공부는 소설공부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주제 공부 시간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선 개념을 정리해보겠다.
나는 타락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리했다. 방종, 죄, 야비가 그것인데 방종은 철부지와도 같은 유아적 타락으로서 술주정이나 마약 따위로 인한 패륜으로 분류하고 여기에서는 죄와 야비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한다. 다음은 내 첫 소설집 <늰 내 각시더>의 작가의 말의 한 대목이다.
.....죄(罪)와 야비(野卑)는 다같이 타락의 일종이면서 본질은 판이하다. 토를 단다면, 죄는 한마디로 철이 없는 무작위적 타락으로서 속빠졌다, 미련하다, 순진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타락이 뭔지 모르고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야비는 철든 작위적 타락으로서 눈치있다, 능숙하다, 약삭빠르다, 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타락이 뭔지 잘 알면서 타락했기 때문에 구제가 불가능하다.
색깔에 비유해도 마찬가지다. 죄의 색은 검고 흰 단색밖에 낼 수 없지만 야비의 색은 천연색과 같아서 자유자재로 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미덕의 색을 잘 흉내낼 수가 있다. 그래서 야비는 진실한 척, 겸손한 척, 의리 있는 척하고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에 악 중의 악이요 독 중에서도 지독(至毒)이다. 야비가 죄보다 더 해롭다는 말은 바로 그 때문이다. 죄는 법으로 옭아맬 수 있지만 야비는 법망이란 그물로도 씌울 수 없어 더더욱 해롭다. 공자도 "그럴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거짓이면서도 참인 척인 것, 범죄이면서도 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야비다. 오염되었으면서도 순수한 척인 것,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척인 것이 야비다. 죄를 지으면 형벌이란 매를 맞지만 야비한테 걸리면 사람이 미치고 만다.
죄와 야비에 대한 그 아포리즘을 남북문제에 대입시켜 장편으로 확대한 것이 <칼날과 햇살>인데 여기에서도 야비의 위해를 심도 있게 다뤘다.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런 부조리한 사회가 되는 것도 사실은 표면에 나타나는 죄보다 속은 검으면서 겉으로는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의리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야비한 인간들 때문이다.
소설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써야겠다"와 "쓰지 않을 수 없다"와는 차원이 다르다. 요컨대 소설쓰기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문창과를 택했으니 마지못해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쓰기를 필연적인 삶으로 여기라는 말이다. 나는 철들 무렵부터 습작해볼 정도로 문학에 목매달았지만 가정형편상 늦깎이 작가가 된 까닭에 한이 많은 사람이다. 여러분 중에도 나와 같은 경우가 많을 줄 안다. 하지만 누구나 늦지는 않다. 이제 시작이다.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만 고심하라.
소설을 쓸 사람은 자신이 직업인이라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소설쓰기'를 직업으로 간주하는 것에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분통을 터트려야 한다. 작가를 직업인? 그건 말도 안 된다. 사실이다. 나는 소설쓰기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직업으로 생각했다면 아무리 보수가 많다 해도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내 나름의 종교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문학을 종교보다 상위 개념에 두고 살아왔다. 문학이 학문의 한 분야로 폄하되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멋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진정한 멋쟁이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태양을 볼 수 있고, 새로운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새로운 울림을 느낄 수 있고, 새로운 의문에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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