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이기를 엄금함. 저작권법에 저촉됨.
수필을 쓰기 힘든 장르로 인식시켜야
소설가 김용만
편의주의가 체질화 되어가는 시대에 문학작품, 특히 수필 장르의 반역적 변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문예창작이 애시부터 일상과 상식을 파괴하려는 반역의식과 반역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수필쓰기의 새로운 모색은 그 본령에 부합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은 작가로 존립케 하는 영원한 생명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예로 들자면 우선 두드러진 경향이 원고 분량의 축소이다. 장편 분량이 중편 분량에 그치거나 단편 분량이 기존의 원고지 매수 절반에 못 미쳐도 이제 흉이 되지 않는다. 독자들이 그만큼 긴 글을 기피한다는 증거다. 심지어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마저 두꺼운 세계 고전을 거들떠보지 않거나, 읽는다 해도 겨우 요약본만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수필 지향적인 분위기가 농익고 있다는 증거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 수용자세 또한 지혜롭고 엄격해야 수필의 부흥기에 접어든 절호의 기회를 발전적으로 선용할 수 있다. 수필을 쓰기 힘든 장르로 인식시키자는 필자의 생경한 주장도 수필 선호 경향을 전제해서 나온 생각이다.
수필의 범람은 수필의 부흥인 동시에 위기이기도 하다.
고답적이거나 기발한 작품을 쓰자는 말이 아니다. 수준 높은 작품만 인정해주자는 말도 아니다. 또 현란한 문체나 형상미의 극대화를 중심 덕목으로 치자는 말도 아니다. 권위를 세우자는 말이긴 하되, 수필을 아무나 쓸 수 있다는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 잡아주자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아무나’의 뉘앙스를 어느 계층과 어느 부류를 지칭할 지가 문제인데, 수필을 ‘부담감 없이’ 쓸 수 있는 장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부류까지 수용해서는 위험하다.
그처럼 편의주의에 오염된 의식구조로는 수필의 세계를 넘볼 수 없다는 자성(自省)의 선을 그어야 한다. 수필창작을 쉽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수필의 운명성, 수필의 절대성을 일깨워주는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선에 머물면서 수필쓰기의 관습화(慣習化) 내지 자동화(自動化)를 반성하고서야 수필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도록 걸러져야 한다.
‘써야겠다’는 의무항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절대항은 차원이 다르다.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절박한 몸부림만이 관습화와 자동화를 파괴할 수 있다. 안이한 착상과 전개로는 평생 익숙해온 관습화와 자동화의 철벽을 깰 수 없다. 그 벽을 깨지 못하면 수필의 신임은 흔들린다. ‘낯설게하기’의 정신이 새삼 요구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미 창작의 기본요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낯설게하기’란 말은 러시아 형식주의를 대표하는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그는 문학작품(詩)에 사용될 언어(詩語)는 정보전달에만 그치는 일상어와 달라야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보행을 구체적인 예로 들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의식되지 않은 채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던 걸음걸이가 춤을 출 때는 새롭게 지각된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일상적인 보행에서는 자신의 걸음걸이를 새롭게 지각하는 경우가 없지만 춤을 출 때는 한 발짝 한 발짝을 낯설게 꾸며서 무용으로 구조화시킨다. 요컨대 춤은 일상의 걸음걸이가 ‘낯설게하기’를 통해 예술화(작품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묘사에서 영향을 받은 쉬클로프스키는 예술을 생활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대상들을 제대로 느끼기 위하여, 정말 돌이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기나 물이나 햇볕 같은 우리 주변에 편재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자동화되어 있기에 망각되므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 최초의 지각(知覺)을 생생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다.
일테면 거실에 있는 소파, 주방의 식탁, 현관의 신발장, 남편, 아내 등은 항상 접하는 관습화된 사물이므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소파나 식탁이나 신발장은 처음 샀을 때의 가구로, 남편이나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의 남자와 여자로 되돌려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호기심이 가지만 여러 번 만난 사람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처음 사용할 때는 신선하지만 여러 번 쓰게 되면 오래 쓴 부엌칼처럼 무뎌져 일상어가 되는데, 이런 일상어는 죽은언어로 창작에 유용하지 않다. 요컨대 낯설게하기를 통한 살아있는 언어만이 창작에 유용한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절박한 몸부림 없이는, 즉 운명으로 여기지 않고는 찾아지지 않는다.
수필가는 지성인일 수밖에 없다. 지성을 거부하는 수필가는 이미 수필을 포기한 사람이다. 지적 허욕은 용서되어야 한다. 품위 차원에서는 부정적일지 몰라도 지식에 대한 욕심은 배움에의 천착을 충동한다. 배움의 열정 없이는 수필은 이미 태동의 근거를 잃는 셈이 된다.
수필가는 또 진실을 캐는 고단한 노역자일 수밖에 없다. 진실을 캐는 노역이야말로 멋을 찾는 삶이기도 하다. 그 멋이란 다름 아닌 진실된 인간형을 말한다. 모든 문예물은 감동유발에 그 존재의의가 있다. 독자를 감동시킬 때에야 문예창작의 교시적 기능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진실만이 감동을 유발시킬 수 있다. 그게 문학의 힘이다.
수필쓰기는 한마디로 진실을 다루는 작업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화두로 삼고 면벽정진하는 고뇌스런 삶이 수필쓰기이다. 양파껍질을 벗겨봐라. 알맹이가 없다. 그래도 알맹이를 찾아 껍질을 벗겨야 한다. 지구의 양파를 다 모아서라도 벗겨봐야 한다. 진실을 캐는 처절한 노역, 그게 수필가의 운명이고 업보이다.
수필의 대중화도 좋고 일반화도 좋다. 하지만 진실을 캐는 핍진성과 배움을 탐하는 지성성을 영혼으로 삼아 창작에 미칠 때 수필은 고매한 자신의 원형을 드러낸다. 필자가 서두에서 말한 반역은 바로 그 미침을 의미하는데, 미치지 않으면 수필의 원형은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수필의 타락이다. (소설가 김용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
점잖은 처신을 다짐하면서도 또 허튼소리를 지껄이고 말았다. 후쿠오카 텐젠 거리의 뒷골목에서 마신 술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 낮술 탓만은 아니었다. 백화점 관광코스에서 일탈하여 혼자 선술집을 찾은 그 문제적인 반역의식(反逆意識)이 이미 실수를 담보한 셈이었다.
나는 소설을 써오면서 내 의식을 분화되기 이전의 원시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써온 게 사실이다. 사물을 낯설게 보려면 상식으로 굳어진 내 의식부터를 개량해야 했다. 그처럼 원시화된 나는 가끔 엉뚱한 짓을 저지르곤 했는데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미친 듯 떠드는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분위기만 잡히면 앞뒤 안 가리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 마치 교회에서 성도가 무의지 상태에서 쏟아내는 방언과도 같다. 방언을 교회가 아닌 길거리에서 쏟아내 봐라. 누가 성한 사람으로 보겠는가. 나 역시 허튼소리를 지껄일 때는 사람대접 받기를 거부한다.
내가 꺼려하는 단어중의 하나가 교양이다. 교양은 매끈한 형식논리를 자극하여 순결한 내용주의를 오염시킨다. 그러니 교양을 무시한 내 허튼소리가 타매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그 타매에서 재미를 느낀다. 말은 사람한테 하고 있지만 실은 무한공간을 향해 애소하고 있다는 걸 누가 알겠는가. 내 허튼소리는 아주 멀고 먼 곳, 우주 끝자락에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교양스런 말은 인간세계에서 통하지만 허튼소리는 우주와 내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튼소리는 산문적(소설적) 표현양식으로 치자면 ‘능청떨기’의 일종이다. 능청떨기는 주관적 정서와 객관적 서사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이완시켜 주관적 정감을 소설의 서사적 논리로 한순간에 일치시키는 묘사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감동 유발이 전제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해학, 위트, 풍자, 역설, 반어 따위의 미학 장치가 개입되어야 한다.
허튼소리는 자유의지에 길들여진 내 소설적 체질 탓에 어쩔 수 없이 터져나오게 마련이다. 만약 체면이나 품위 때문에 온천수처럼 분출하는 허튼소리를 틀어막을 경우 내 의식과 정서는 교양화되고 인격화되고 규범화됨으로써 돌처럼 굳어지게 된다. 나는 자신을 타인화 할 수 없고, 사물을 낯설게 인식할 수 없으며, 상식을 깰 수 없고, 일상의 도그마에 갇히게 된다. 그러니 허튼소리는 내 허위의식을 닦달하는 죽비이자 주먹질인 셈이다.
물론 이런 말이 품위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내 허튼소리에 대한 변명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래서 침묵이 필요하고, 침묵하기 위해 잠이 필요하다. 잠은 허튼소리를 틀어막을 수 있는 가장 쓸만한 도구이다.
이번에 어느 문학단체가 주최하는 해외 심포지엄을 계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졸음기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일본측 발표자 한 사람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오랫동안 곁에서 모신 적이 있는데, 불면증에 시달린 야스나리는 자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나는 야스나리의 그 졸음기를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싶었다.
신감각파(新感覺派) 문학운동의 태두였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도 허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야스나리는 세계를 보는 눈이 비정하고 냉혹했다. 두세 살 때부터 부모와 육친들의 죽음을 목격한 그는 죽음의식과 애정욕구가 남다를 테고, 그 두 가지 시추에이션인 허무와 탐미는 그를 예민하면서도 관조적인 묵언(黙言)의 체질로 성장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체질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세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그의 묵언은 사람과 사회에 쏟아내고 싶은 말을 삼켜버리곤 했다.
답답하거나, 서글프거나, 어이없거나, 모순되거나, 실망스럽거나, 눈꼴사나울 때는 한바탕 떠들어야 숨이 트인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 허튼소리를 대신할 묘책이 필요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우에는 그 묘책이 잠이었을 것이다.
떠들 것이냐 침묵할 것이냐, 그 두 가지 갈등 중에서 그는 후자를 택했던 것이다. 나도 이제부터는 잠을 택해야겠다. 눈을 감고, 귀와 입을 막은 채 잠을 청하면 된다. 잠이 안 오면 술에 취해서라도 잠을 청하면 된다.
'문학과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온 세상이 "나"를 등지더라도 (0) | 2010.11.11 |
---|---|
[스크랩] 잔아문학관에서의 글향기 품평회 (0) | 2010.10.09 |
[스크랩] 9월호(통권57호) 문인탐방_정종명 소설가/김혜정 (0) | 2010.09.21 |
[스크랩]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0) | 2010.07.30 |
[스크랩] 소설강의는 별도 (0) | 2010.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