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칠선계곡을 기억하며

정진숙 2014. 12. 13. 20:41


제가 좋아하는 박완서님의 책 중에 이런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이 수필은 마라톤경기를 우연히 참관하던 중에 있었던 일화를 적은 글입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등으로 골인한 선수보다

마지막 완주자에게 더 큰 격려의 박수를 보내게 되더라는 메시지의 글입니다.

몇 시간을 지켜보는 동안 지칠 만도 한데 끝까지 남아 마지막 한사람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며

저절로 울컥하였다는 작가의 마음이 잘 전해지는 글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꼴찌의 삶으로 살기를 원치는 않을 것입니다.

일등을 지향하고 남보다 조금은 더 앞서기를 바라며 살게 되겠지요.

저 또한 그 중의 일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사 마음먹은 만큼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매사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게 산은 저 혼자의 짝사랑이기도 합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시작한 산행이니 햇수로는 삼십 여년이 다 되어가네요.

백두대간도 타고 종주산행도 하며 꾸준히 산과 가까워지려 나름으로 노력해도 해결이 안 되는 단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위에 대한 공포증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오랜 동안 산과 인연을 맺었음에도 저는 여전히 꼴찌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산을 다니고도 아직도 바위가 무섭냐고.

, 무서워도 너무 무섭습니다.

 

어쩌면 전 고소공포의 강박증을 가진 마음의 장애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남모르는 약점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성향이 그러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살아가는데 아쉬울 건 없지요.

다만 산을 오르는 길에 동행하는 이들에게 민폐가 됨이 늘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산을 놓지 않은 저를 스스로 응원합니다.

박완서님이 목격하신 그날의 마라톤 마지막 완주자처럼 빠르게 달리진 못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는 것이 저의 목표니까요.

두려운 바위는 어느 산에나 숨어있기 마련이지만 꿋꿋이 부딪쳤기에 이 시간까지 왔습니다.

몸이 얼어붙어 발을 뗄 수 없는 길이 내 눈앞에 있다한들 되돌아서지 않았기에 아직도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칠선계곡 마폭우골에서 꼼짝 못한 채 떨고 있는 초라한 저에게

발을 옮기도록 안아주시고 같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다독여주신 여산우의 음성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지리산 칠선계곡 마폭우골 대협곡 직등로

이름도 길고 긴 그 등로를 제가 오르긴 애초에 불가했습니다.

그러나 바위길은 나타났고 피할 수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대장님과 산우님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 험한 등로를 오르기는 정말이지 불가능했을 겁니다.  

매번 산행을 할 때마다 산이 맺어준 산우들과의 끈끈한 우애를 느끼곤 합니다만

그 날 많은 분들의 배려와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좀 늦으면 어떻습니까. 먼저가 봐야 오십 보 백보예요. 서둘지 말고 천천히 가세요.

가파른 길을 내려오며 늦지 않겠다고 서둘러 발길을 옮기다 자꾸 미끄러지는 제가 안타까우셨는지

뒤에 오시는 한 산우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많이 고마웠습니다.

저의 마음을 읽어주신 것 같은 그 말이 참 따뜻했습니다.


한 삼년쯤 전에 큰맘 먹고 릿지교육을 5주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위를 두려워하는 강박증을 극복해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말입니다.

수료할 때까지 숱한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점은 극복되지 않았지만 그때의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한번 지나고 두 번 지나면 점점 더 나이지리라 믿고 싶습니다.

아마 저의 그런 바람과는 달리 산을 오르는 내내 늘 꼴찌로 남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한들 상관없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에 행복이 있으니 일등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저의 속도대로 묵묵히 걸을 작정입니다.

산이 거기 있는 한 산을 향해 걸어 갈 것입니다.

혹여 저를 그 산길에서 만나신다면 좀 늦어 불편함을 드리더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인연이라 여기시고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천왕봉을 700미터 남겨두고 돌아서며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돌아보았습니다.

이미 네 번을 올랐었기에 아쉬울 거야 없으련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르려 하면 오를 수 있었겠지만 생각을 접었습니다.

제 욕심 때문에 다른 산우님들의 귀한 시간을 뺏으면 곤란하니까요.

칠선의 비경과 오르지 못한 천왕봉이 여전히 눈에 밟힙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북두칠성이 기울어가는 산길로 들어서며 시작 된 칠선계곡 길.

그 날의 특별한 경험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합니다.

지리산 칠선에서 만난 산우님들과의 아름다운 인연도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격려와 도움 주신 귀한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래동 골목에서  (0) 2015.05.10
엄마의 추어탕  (0) 2014.12.24
부산으로의 시간여행  (0) 2014.11.12
시절인연  (0) 2014.05.11
벌써 은혼식  (0) 2014.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