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파가 며칠 째 계속되고 있다. 두터운 외투는 물론이고 장갑에다 목도리까지 휘휘 둘러 온몸을 감싸고도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기엔 역부족이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친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살피다가 추어탕 집이 눈에 띈다. 이런 날엔 뜨끈한 국물이 제 격이겠다 싶어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분주한 식당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려니 괜히 머쓱해진다. 이 음식을 딱히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도 아니다. 불현듯 혼자 먹기엔 다소 멋쩍은 메뉴를 무심코 택한 까닭이 꼭 추위 탓만은 아닐 거란 느낌이 들었다. 한 해를 보내는 세밑에 이런저런 일로 마음 번잡했음일까. 그래서 기운을 돋우고 나를 다독여줄 소울 푸드가 필요했던 건 아닌지. 살다보면 헛헛해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땐 왠지 그걸 먹고나면 힘이 날 것 같은 먹거리들이 있다. 그닥 세련되지 않은 추어탕이 은연중 나의 지친 심신을 토닥거려주는 소울 푸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몇몇 장면들이 겹쳐진다.
언제부턴가 친정엄마는 명절이나 생일 등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면 추어탕을 끓이곤 하셨다. 조리법이 간단한 것도 아니고 잔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노구의 몸으로 손수하시는 게 마뜩치 않아 극구 말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더 황당한 건 식구 중에 추어탕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번 고집스레 끓이는 이유를 여쭈었더니 맏이인 내가 잘 먹어서 그런다고 하신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랬던 적이 없는데 무슨 말씀일까 싶었다. 어머니는 종종 뭐든 맛있게 잘 먹는 나를 예쁘다고 하셨다. 어릴 때야 형제가 여럿이니 서로 앞 다퉈 먹느라 잘 먹을 수밖에. 어머니 눈에 나는 여전히 아이인가 보다. 추어탕을 내가 좋아한다고 여기시는 건 그런 의미였거니 짐작해본다.
대구에 살던 때,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살림살이에 힘을 보태셨다. 수북히 쌓인 옷감에서 나던 화학섬유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잊혀 지지 않는다. 바느질이 끝난 일감을 보자기에 싸서 서문시장의 옷가게에 전하러 제법 여러 번 심부름 간 적도 있다. 오며가며 한 눈 파느라 오랜 시간 지체되면 영락없이 혼 구멍이 나곤 했었다. 인형가게도 기웃거리고 옷가게의 예쁜 옷에 넋을 놓기도 하고. 먼 길을 가는 게 힘들었지만 나름의 재미가 솔솔 해서 좋았다. 지나고 보니 울 어머니는 참 용감한 분이셨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그 먼 데로 심부름 보낼 엄두를 내셨으니. 요사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가끔씩 어머니와 시장에 같이 가곤했다.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나리꽃이다. 신문지에 쌓인 짙은 주황색꽃 한다발. 그리 궁핍했던 날에도 내 부모님은 멋과 낭만을 아는 분이셨다. 맛있는 거나 사지 왜 꽃을 사냐고 물었던 것 같다. 네 아버지가 화병에 꽃을 좀 꽂아 놓으라 하신다고 했던가. 가물가물한 장면 속에서 엄마를 올려다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나리꽃은 단칸방의 나의 보물 1호인 책상 위에서 며칠 동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날도 어머니와 시장에 들러 필요한 걸 사서 합승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거리로 학교 담장 옆에 심은 여린 배추를 솎아 넣고 맑은 추어탕을 끓이셨다. 아이 입맛에는 이상할 법도 한데 이게 뭐냐며 맛나게 먹었던 것 같다. 그날 먹었던 칼칼하고 알싸한 맛이 혀끝에 느껴지는 듯하다. 어머니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시나 보다.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내가 잊지 않은 것처럼 어머니도 잊지 않고 계셨다.
뚝배기에 담긴 추어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엄마의 위로가 되어 심신의 한기를 내몬다. 비록 엄마의 손 맛은 아니더라도 따뜻한 격려가 되어 나를 토닥여준다. 소울 푸드, 영혼을 달래주는 이 한 그릇의 음식으로 마음 다독여 힘을 내자. 그 힘으로 또 한해를 희망으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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