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지나간 시간들이 내게 주는 아픔을. 영화가 천만을 넘어 천 삼백만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보고 싶지 않았다.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의 지난날을 고스란히 재조명한 감동적인 드라마라며 극찬을 했다. 그럼에도 미루어 짐작 컨데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이야기들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국제시장의 장면 중 많은 시간를 공유하며 살았음에도 나는 왜 그 영화를 외면하려 했을까.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날들을 돌이켜 보기가 고통스러웠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의 피난행렬을 클로즈업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로지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런 현장을 아비규환이라고 하나. 전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아우성치는 피난민들의 절규가 화면 가득히 그려진다. 바로 눈앞에서 피붙이와 생사가 엇갈리는 처참함이 생생하다. 불구덩이로 변한 흥남부두를 탈출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만 4천명이라고 그날의 역사는 기록한다. 거제도로 가는 사흘간의 항해에서 5명의 생명이 탄생하기도 했다. 12월 24일 극적으로 거제도에 도착하여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도 일컬어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구출작전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작전으로, 가장 인도적인 작전으로 인정받았다. 또 가장 많은 피난민을 태운 단일선박으로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잃고 살아남은 주인공의 가족들은 부산에서의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흙먼지 날리는 길을 내달리며 미군에게 기브 미 초콜렛을 외치는 남루한 아이들, 가난과 혼란의 시간을 허우적거리는 거리풍경. 1960년대 중후반 국제시장의 실제 풍경이다. 내겐 낯설지 않은 이 광경을 우리가 벗어난 지 불과 5,60년이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루었다는 하나만으로도 참으로 대단하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을 아버지의 실명으로 대신한 윤제균 감독은 이 영화는 고난의 시대를 산 우리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헌사라고 말한다. 한편의 다큐라 해도 될 만큼 역사적인 사건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시대적인 배경을 그대로 담아 낸 영화였다. 관람하는 내내 어느 누구의 아픈 기억도 아닌 모두의 아픔일 수 있는 그 시간들을 바라보기가 참 버거웠다.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땅에 가서 보낸 수많은 인고의 날들,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어 보낸 길고 긴 통한의 날들, 시대를 관통했던 상흔들이 하나하나 그려질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눈물 없이는 다시 보기조차 힘든 그 시절을 우린 지나온 것이다.
상영 초기에는 많은 논란들이 있었다. 현 정권에 아부하는 감상주의적 영화라느니, 과거의 희생을 빌미로 현재의 치부를 감추려는 국수적인 영화라느니. 구성이나 표현방식, 작품성과 주제 전달면에서 여러 이견들이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변함없는 한 가지는 그 모든 내용들이 허구가 아닌 실지로 일어났던 현실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불변의 사실이 논란을 잠재울 이유가 되지 않을까. 모두가 몸과 마음으로 겪어낸 그때의 참담한 상황들을 두고 어떤 불순한 의도를 말할 수 있을까.
TV를 보다가 영화 국제시장의 성공을 놓고 패널들이 토론하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영화의 장면을 역사적인 기록물과 빗대어서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을 보며 이 영화의 스토리가 지닌 리얼리티를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힘겹게 살아온 세대의 희생에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방송 내용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일화였다. 서독정부의 공식초청을 받은 우리정부는 막막한 문제에 부딪친다. 초청받은 독일까지 대통령이 타고 갈 비행기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에 부탁해 보았지만 거절당하자 한 독일유학생의 기지로 독일정부의 협조를 얻어 28시간의 비행 끝에 독일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기막힌 내용이었다. 홍콩노선의 독일항공기 한편이 홍콩에 여객을 내려주고, 우리나라에 임시로 들러 대통령 일행을 싣고, 항공사의 예정된 경유지 여섯 곳을 전부 들러, 마지막으로 독일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다. 일국의 대통령이 겪어야 했던 일이라기엔 너무도 민망하고 착잡한 일 아닌가. 못사는 나라의 대통령이 느꼈을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지.
긴 여정 끝에 광부들을 마주한 대통령 내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흑백의 자료화면에서 나온다. 탄광의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광부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서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대통령은 여러분의 고생을 잊지 않겠다, 나도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을 머금고 다짐한다. 그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그곳에 있었지만, 가난한 국가의 얼굴이 되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가 애국가가 나오면 국기를 향해 예를 갖추던 시절,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올리던 시절을 영화는 보여준다. 정말 그랬다. 애국이란 단어 앞에 자의든 타의든 한 마음이 된 때가 있었다.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 되기 위해 똘똘 뭉쳐서 눈물겹도록 힘들게 살던 그런 때가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이 보여주듯이 참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 덕분에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모두가 잘 산다 말하긴 어렵더라도 적어도 배가 고파 우는 일은 없게 되었다. 종전 후 60년이란 시간을 지나서 전후의 가난과는 비교불가의 눈부신 성장을 이룬 오늘의 대한민국. 누가 뭐라 볼멘소리를 하건 나는 이 땅의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외면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한 날들을 벗어나고자 우리 아버지세대가 얼마나 모진 애를 쓰고 살았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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