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씨 이야기 / 파트리크 쥐스킨트, 유혜자역 / 열린책들, 발행일 2002. 2. 20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아름다운 유년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동화다. 아름다운 호수를 낀 숲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는 소년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좀머씨를 만나게 된다. 마치 유령처럼 실체가 없는 듯이 존재하는 좀머씨는 무성한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이른 새벽의 안개 속에서 끝없이 걸었다. 그리고 어둠이 내리고 밤이 이슥해질 무렵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집으로 돌아온다. 깡마른 키에 마른 빵이 든 커다란 베낭을 짊어지고 지평선을 지나가는 흐릿한 점처럼 하나의 배경으로 기억되는 좀머씨.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그의 존재는 소년의 삶에서 소중한 역할을 한다.
전쟁을 겪은 후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좀머씨의 바람은 그 누구도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그가 벗어나고자 한 것이 세상의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소년이 겪어가는 유년의 위기마다 좀머씨는 어디선가 나타나 눈앞을 스쳐 지나며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년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어쩌면 존재의 의미라는 것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누구도 상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삶도 어느 누군가의 삶에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소년의 인생 곳곳에 등장했던 좀머씨는 소년의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호수의 물 속으로 잠겨 어디론가 사라진 좀머씨는 이렇게 성인이 된 소년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는다.
내가 느끼는 이 작가의 매력은 이야기가 주는 강한 이미지를 잔상으로 오래도록 남기는 것에 있다. 책장을 덮고도 그 내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지독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향수>를 읽으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놀라움과 충격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도 강렬한 줄거리와 주인공의 유일무이한 존재감에 한참을 멍하니 내용에 빠졌던 거 같다. 몸에 밴 듯한 향수의 여운이 쉽게 떨쳐지질 않아 오래도록 몸서리치던 기억은 영화로 나온 작품을 보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결국 영화는 보지 못했다.
투명한 수채화처럼 맑은 여운으로 남는 좀머씨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사람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과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싶어하는 부박한 누군가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악플로 사람이 죽기도 하는 이상한 세상이다. 날 제발 내버려 두라는 좀머씨의 바람은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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