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푸른 스크린의 유혹

정진숙 2016. 5. 10. 16:43

블루 아라베스크 / 퍼트리샤 햄플 l 정은지 역, 아트박스, 2009년 2월 12일 발행


퍼트리샤 햄플의 나른한 환상이 책속에서 넘실거린다. 지중해의 아쿠아마린 빛 푸른 바다가 마치 눈앞에 넘실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날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마티스의 그림 한 점에 영혼이 멈춰버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 그녀. 화가의 작품에 단 한 번도 감동을 받은 적 없는 그녀였지만 마티스의 그 그림이 강렬하게 이끄는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어항 앞의 여인' 이라는 그림 한 점에서 시작된다. 실체를 잊고 있던 내면의 근원적인 그리움을 이끌어 내어 마침내 그 그리움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했는지 알게 해준 블루 아라베스크. 푸른 아라베스크를 배경으로 앉은 한 여인이 어항 속의 물고기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그림에는 과연 무슨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퍼트리샤 햄플은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자신이 제일 바라던 삶이었다는 한가함의 욕망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연다. 푸른 스크린은 그런 내재된 욕망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한” 것인데 이 여인의 무표정한 응시는 작가의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인식의 촉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큐레이터인 친구의 조언에 의하면 그 그림은 마티스의 작품 중 그리 중요한 작품이 아님에도 그녀는 그림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마치 그림에 얻어 맞은 듯 강한 충격을 받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양 아라베스크는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를 암시한다. 무한하고 중심이 없는 영속적인 신의 세계, 인류가 추구해온 이상적인 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녀는 마티스가 북아프리카 여행에서 프랑스로 가져온 이 그림 속, 모로코식 블루 아라베스크 너머의 이야기를 찾아 긴 사색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오달리스크에 얽힌 서구의 틀어진 욕망과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를 향한 예술적인 여정을 대비시키며 그의 삶을 들여다 보고 있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는 한가함의 미학, 삶의 관조, 오랜 노동 뒤의 안식, 아름다움에 대한 꿈의 형상화였다. 마티스의 그림 한 점에서 비롯된 관심을 시작으로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과 삶을 아우르고 연결지으며 작가는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만든다. 또 그들과 연결된 자신의 유년을 돌아보며 케서린 맨스필드와 얽힌 도리스 더먼의 인생과 그녀들의 사적인 목소리에 몰입했던 사춘기를 추억한다. 그녀는 예술이 어쩌면 엿보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힐끗 스치는 순간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스케치하고 기록하는 것, 그것은 예술이라는 형식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모든 예술가는 언제나 여기가 아닌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찾아 길을 떠난다. 예술가들의 성지인 지중해 연안 프랑스 남부해안 카시스와 코트다쥐르. 남국의 햇빛을 찾아 그리고 영감을 찾아 음악가, 화가, 작가들이 그 곳으로 온다. 눈부신 태양을 향유하는 앙리 마티스, 스콧 피츠제럴드, 제롬 힐, 케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그녀는 그녀만의 사색으로 물들이며 우리에게 전해준다.

예술의 진정한 힘은 시공을 뛰어넘는 공감에 있지 않을까. 지중해의 눈부심에 열광하는 그들에게 매료된 퍼트리샤 햄플처럼 나또한 그녀의 예술적인 감성이 넘치는 이 글에 매혹 당해 한동안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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