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사는 법 / 연암서가 | 2011년 5월 30일 발행
서로 다른 세월을 살아가면서 같은 장소에 얽힌 사연을 공유한다는 것은 더욱 남다른 감동을 갖게 만든다. 숙란을 알고 있음은 숙명의 전통에 함께 포함됨을 말한다. 숙란은 숙명여고의 교보의 이름이다. 교명의 첫 글자인 '숙'과 교화인 영란화의 가운데 글자인 '란'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아마도 선배 문인들은 이를 염두에 두고 숙명을 졸업한 문인들의 모임을 숙란문인회라 명하였으리라.
박완서님의 유고작인 행복하게 사는 법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은 수필집. 이 책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22명의 여성문인들의 보석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담은 숙명여고 출신 문인들의 동인지다. 한말숙님을 필두로 생전에 뵈었던 박완서님과 일년 선배이신 소설가 권지예님, 나의 재학시절 교장으로 계시던 수필가 정충량님, 시인 김양식님, 소설가 최정희님, 정연희님, 신중선님....... 선배 한분한분의 자랑스런 이름 석자를 만나며 내내 떨리는 가슴으로 설레고 반가웠다.
수송동 70번지의 빨간 벽돌 건물 담벽을 타고 오르던 담장이 넝쿨. 그때의 정경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는 기쁨이 이렇게 클 줄이야. 그 건물이 이젠 그 자리에 없어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엇비슷한 추억을 지닌 사람에게 집착하도록 만든다. 누구라도 그때를 조금이나마 알아주면 순식간에 친근감이 샘솟고 연대감이 생겨나 무턱대고 반갑고 기뻤다. 그러니 한꺼번에 이리 많은 동문들의 글을 만나는 반가움이 어떠하겠는가.
정작 여고시절엔 학교의 소중함을 미처 알지 못했다. 진학제도가 추첨제로 바뀌고 4년이 되던 해에 운좋게 숙명에 들어온 우리 또래 세대는 선배들의 너무나 큰 아우라에 가려져 기를 제대로 못펴고 지냈다. 매사에 선배들과 비교하는 선생님들의 우리를 향한 눈에 보이는 무시는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다. 전통의 버거운 무게는 자랑보다는 그늘이 되어 우릴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힘든 시절의 모든 게 지금은 그리움이 되고 아쉬움이 되었다.
왜 사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들 이야기한다. 과연 행복하게 사는 법에 정해진 답이 있을까. 박완서님은 그 답을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인간관계에서 찾으셨다.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관계가 원활치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현재의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지나간 날의 추억 중에서도 사랑 받은 기억처럼 오래 가고 우리를 살맛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인생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과정의 연속인 인생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지점에서 박완서님이 남긴 의미있는 잠언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행복의 크기는 감사함의 깊이에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하루하루를 깊이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되묻는다.
한편한편 글을 읽으며 숙명이라는 큰 울타리가 키운 여성문인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 드디어 편안히 마주하는 문학과의 만남을 기뻐하는 선배들.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로 부터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다한 후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다시 만나는 행운이 녹녹하기만 했겠는가. 그럼에도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문인의 반열에 자리매김한 숙란문인회 선배들께 마음을 다해 경의를 표한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적 신념을 바꾸기 어려운 이유 (0) | 2017.01.08 |
---|---|
푸른 스크린의 유혹 (0) | 2016.05.10 |
쉘부르의 우산 (0) | 2016.04.20 |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0) | 2016.04.05 |
겸재 정선 (0) | 2016.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