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익선동 그곳은

정진숙 2016. 6. 26. 21:11


종로 3가역 4번 출구를 나선다. 한낮의 더운 공기가 훅 다가온다. 장마철 후덥지근한 대기 속에서 비릿한 생선냄새가 언뜻 코끝을 스친다. 도심에서 맡을 법한 음식냄새는 아닌데 근처 홍어삼합 식당이 진원지였다. 토속적인 이름을 건 밥집과 주점들, 익선동 가는 길목에서 만난 첫 풍경이다. 도로를 건너 번지 없는 주막간판을 바라보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1970년대의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좁은 골목양쪽에 낡은 의자 하나씩 들고 나와 앉아 계신 할머니들. 무더운 여름날 골목 평상에 삼삼오오 둘러 앉아 한나절 소일하던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만난다. 기와지붕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장미, 그 아래 활짝 핀 초롱꽃과 투박한 플라스틱 화분들. 궁핍한 삶에서도 깨진 그릇에 화초를 길러내던 옛 어머니들의 소박한 마음을 만난 것 같다. 갑자기 마주한 그 정경 앞에 그저 먹먹할 뿐 생각은 멈춰버리고 말았다.

 







서울 한복판의 오지 익선동은 동쪽의 종묘, 서쪽의 인사동, 북쪽 창덕궁과 북촌, 남쪽 종로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북촌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종로 거리가 빌딩숲으로 변할 때까지 40~5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옛 모습을 지켜온 동네다. 번화가의 사각지대에 숨겨진 익선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이 마을의 찻집 뜰안2010년 한일합작 영화 카페 서울의 촬영지가 되고, 공영방송의 다큐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옛 모습에 대한 어떤 향수가 이 좁은 동네로 사람들을 이끄는 게 아닐는지.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에 의해 개발된 익선동 한옥마을은 북촌보다 앞서 지은 도시형 한옥주거단지였다. 전통적인 한옥의 특성을 살리고 생활공간을 편리하게 재구성한 과도기적 형태의 주택단지다. 그동안 현실적인 여러 문제가 맞물려 개발의 거대한 폭풍에서 비껴나 요행으로 옛 정경이 살아남은 마을이다.

 

개발계획이 전면 수정되어 보존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산재한 여러 문제들은 여전하다. 도심에 근접한 입지인 만큼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충분한 지역이기에 호시탐탐 노리는 개발의 시선을 차단하기도 어렵다. 현재 거주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영세한 세입자들이고 보니 마을의 보존을 위해 그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새 바람을 일으키는 젊은 이주자들의 바람직한 움직임들이다. 그들은 이 마을의 가치와 근대적인 역사성에 공감한다. 마을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의 개선과 보수로 기존의 프레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여러 변화들이 지역주민의 삶에 직접적인 혜택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그간 홍대나 합정동, 가로수길 등 여타의 지역에서 보아온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이곳에선 반복되지 않기만을, 거주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개발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한옥지킴이를 자청하며 서촌의 한옥에서 살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는 한옥이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한옥이 계속 진화했다면 불편하다는 얘기가 없었겠지만... 산업화와 더불어 한옥 주거 형태가 급격히 사라진 것이 문제라며 익선동은 20세기 도시형 한옥의 본 모습을 가지고 있어 건축적 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특히 빌딩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익선동의 장점이다. “도시는 다양한 경관, 풍경이 있어야 재미있는 곳이 됩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한옥과 양옥, 여의도나 테헤란로와 북촌 등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건축물이 있어야 하는데 익선동은 그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리 삶의 공간에 대한 의견을 외국인의 말을 통해 듣는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생활문화의 변화단계를 조금 더 앞서 겪어 왔기에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많은 시행착오를 그들이 객관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 도심의 골목길로 들어가는 것은 서울의 가장 오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도시에서 가장 늦게 변하는 것이 길이다. 집은 자주 다시 지어질 수 있지만 골목길을 비롯해서 길은 그렇지 않다. 길은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골목길은 옛 서울의 기본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골목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그 골목길이 만들어지던 때를 마음속에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골목길은 단순히 아늑한 길이 아니라 역사를 담고 있는 무거운 길이다. 도심의 골목길이 없어지는 것은 도심의 수백년 역사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홍성태의 서울 만보기 중>



골목길의 역사도 역사지만 어쩌면 도시의 삭막함을 완충시켜줄 대안이 익선동과 같은 추억 공간이 아닐까 싶다. 지나간 날을 반추하며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딘가를 짚어볼 수 있게 해주는 곳. 나고 자란 장소의 모든 흔적을 잃어버린 도시인의 실향의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 익선동은 바로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