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귀가가 늦다. 걱정보다 서운함이 앞선다. 이젠 성장해서 간섭이 필요 없는 나이, 자식이 다 자라고 나면 훌훌 편할 거라 여겼는데 어미의 역할이 줄어듦이 이리도 허전하게 느껴지다니.
스무 살 중반인 아들은 요 근래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 또래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어 반가워해야 함에도 마음은 영 그렇지가 않다. 어느 덧 품안의 자식을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아 되레 적적해진다. 못내 섭섭한 맘이 들다가 문득 예전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결혼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집 떠날 날도 멀지 않으니 쉬는 날 하루라도 엄마랑 같이 지내자던. 그 작은 바람을 못 들어 드리고 볼일이 있다며 문을 나서는 모습이 지금 돌이켜보니 밉살스럽다. 어머니는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뭣 모르고 저지른 불효를 뒤늦게나마 깨달을 때면, 꼭 너 닮은 자식 낳아서 키워보란 부모들의 넋두리가 이해된다.
사춘기 무렵 부모님은 잦은 다툼으로 서너 해 별거 하신 적이 있다. 그럴 만 했던 두 분의 처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학업만도 벅찬데 어머니를 대신해 소소한 집안일에 동생들 돌보기까지 모든 게 버거웠다. 맏이의 책임감으로 가까스로 버텨내긴 했지만 두 분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한창 예민한 시절을 어둡고 우울하게 보낸 터라 그때의 앙금이 오래도록 남았다. 건강한 몸으로 낳아 길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긴 시간 품었던 부질없는 애증이 이제와선 후회스럽다. 요사이 부쩍 수척해지신 부모님을 뵐 적마다 그래서 더 먹먹해진다. 건강하게 사실 날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아 점점 조급해지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거동이 편할 때 자주 모시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과 상의해 두어 해 전부터 부모님과 계절마다 여행을 다니고 있다. 가까운 곳을 다니며 옛이야기 나누고 맛난 것 먹으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작년 가을 인제여행에서 단풍을 보고 좋아하시던 모습, 지난 봄 가평에서 봄꽃을 보며 즐거워하시던 모습, 이번 여름 대관령 여행길에서 흡족해하시던 두 분의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뻤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대구 큰댁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 서울로 이사 온 후 할머니 뵌 지가 너무 오래라 부모님을 졸라 어렵게 여비를 마련했다. 동대문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떠난 지 두 해 사이 시가지가 확 변해있었다. 큰길이 새로 뚫리고 내가 알던 길은 없어지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간신히 예전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큰집이 있던 동네를 찾아갔다. 더위에 목은 타고 배는 고프고, 같이 간 일곱 살 막내는 칭얼대고 눈앞이 막막했다.
언덕바지 골목길에서 요기거리를 찾아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빵이라도 사먹을 양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천우신조란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큰댁 사촌언니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며. 너무 놀랍고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까. 낡은 초가집 터로 새 길이 나는 통에 큰댁은 근처로 집을 옮긴 후였다. 이사한 집의 주소만 가지고 내려갔으니 못 찾으면 파출소에라도 갈 참이었다.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어렵사리 당도한 큰집에서 이년 만에 뵌 할머니는 우시느라 제대로 말문을 열지도 못하셨다.
할머니는 막내아들인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하셨다. 또 아버지의 첫 딸인 나를 유독 예뻐하셨다. 나 역시 할머니가 세상에서 젤 좋았다. 큰댁 어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팔순이 넘은 할머니를 모시고 올라왔다. 쪽진 머리에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으신 할머니는 처음 구경하는 서울에서 그해 광복절에 첫 개통한 지하철도 타보시고 손녀 덕분에 출세했다며 기뻐하셨다. 거동도 불편한 분을 모시고 왔냐며 첨엔 호통을 치시더니 아버지는 기특하다고 칭찬해주셨다. 손잡고 대공원에도 가고 시내구경도 하고 며칠을 같이 지내다 할머니는 대구로 내려가셨다. 그리곤 형편 피면 또 모실 거라고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다시 뵙지도 못하고 오년 후 돌아가셨다. 그때라도 못 보셨으면 막내아들 사는 서울구경 한 번도 못하고 돌아가실 뻔했다.
힘든 살림살이에도 명절이나 제사 때면 먼 길 마다않고 큰댁에 가시던 아버지. 평소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늘 보고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부모에겐 어찌 해야 한다는 것이 몸에 뵈었던 것 같다. 자식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로 가르치기보다 몸소 보여주는 것이 도리임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우리 부모님이 할머니께 하시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러해야함을 절로 안 것처럼 아들도 내가 부모님께 하는 모습을 보며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않을까. 부모를 부양하는 세대는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살아감의 풍경이 아무리 각박하게 변해도 내가 지은대로 내게 되돌아오는 이치는 변함없으리라 믿고 싶다. 비록 그때는 몰랐어도 세월 흘러 깨닫게 된 지금의 나처럼 아들도 언젠가는 부모 맘을 알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