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범일동 연가

정진숙 2016. 8. 15. 19:38



  

 무언가에 대한 결핍은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길 바라게 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독한 천착 또한 내면에 잠재된 강한 보상심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왜 그토록 내가 살아온 흔적을 찾으려 애썼던 것일까. 답은 내 성장기의 정체성을 말해 줄 아무런 것도 현재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나고 자란 터전을 잃은 상실감은 가끔씩 공허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인지 어딘가에 안착하지 못한 불안정감이 늘 따라다녔다.

 서울에 정착하기 전 어릴 적 12년간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우리 가족은 자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는 고달픔은 성장기 아이에게 큰 트라우마였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아이가 견디기엔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늘상 그리움에 시달렸던 것 같다. 떠나온 것에 대한 연민을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 버렸다.

 부산은 예닐곱 살 무렵의 한 해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서 3학년 1학기까지 삼년 남짓 살던 곳이다. 그 짧은 사이에도 네 번이나 이사를 했으니. 전포동에 살던 일 년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범일동에서 살았다.

 첫 집은 시장 근처 철길이 지나가는 곳 옆이었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담장 너머로 기찻길이 보였다. 담장 옆에 기대서서 달리는 기차를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곤 했다. 하루에 수도 없이 지나가는 기차는 꼬맹이인 내게 반가운 친구였다.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난간에 서서 같이 손을 흔들어주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1966년경이니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내려온 군인들이 부산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월남으로 떠나던 때였다. 뭔지도 모르고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던 장면이 생생하다.

 잠시 태생지인 대구로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사 온 곳은 전포동이다. 가파른 골목길의 빼곡한 집들 사이로 학교를 가려면 숨을 헉헉대고 걸어야 했다. 나무로 지은 단층 교사는 겨울에 무척 추웠다. 고사리 손으로 쇠 난로에 조개탄을 넣던 게 생각난다.

 1학년 가을의 어이없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아침에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데 아이들이 줄을 지어 교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뭐지 하던 순간. 아뿔싸, 소풍가는 날이었다. 바쁜 엄마에게 내일 소풍날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고 신나게 놀다가 깜빡 했던 것이다. 집으로 달려가 엉엉 울며 떼를 써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르고 달래도 안 되겠던지 엄마는 우리끼리라도 소풍을 가자며 이것저것 준비해 집을 나섰다. 동생 둘은 걸리고 막내는 업고 뒷산인 돌산으로 소풍을 갔다. 단풍든 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가을바람에 하얀 억새가 흔들리던 풍경이 또렷이 떠오른다. 참 별일이다. 왜 이런 장면에서 먹먹해지는 건지.

 집을 다시 옮기며 전포동 성북초등학교에서 범일동 성남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평지에 있었다. 좁은 골목은 여전했다. 한술 더 떠서 좁다 못해 방문과 방문이 한 걸음 폭으로 마주 보였다. 판자로 칸막이된 벽에 합판으로 만든 미닫이 문. 그런 판자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몇 개의 골목이 연달아 있었다. 우리 방에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옆집에서 금방 대답을 들을 만큼의 거리였다. 방 두 칸 사이에 백열등 하나를 걸어 같이 쓰는 집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십 수 년 후의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풍경이다.

 이 동네가 매축지 마을이란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신기한 별세계 인터넷 세상 덕분이다. 어느 사진에선가 낯익은 골목풍경을 보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살던 그 골목이었다. 아직 그대로 있다니. 꼭 일 년을 살았지만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났기에 아쉬움을 남기고 왔던 곳이다. 어디서든 비슷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애썼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 가난한 것이 무언지 남루한 것이 무언지 몰랐다. 그곳이 일제 때 항만 인근 물웅덩이들을 매립한 땅이며 말을 부리던 인부와 짐꾼들이 머물던 곳이며 6.25 때 피난민들이 모여 살게 된 동네란 것도 몰랐다. 그저 따뜻하고 정 많은 이들이 살던 데라는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마치 잃었던 고향을 찾은 것처럼 반가웠다.

 우리 아버지는 봉제공장 사장님이셨다. 공장 이층 창문에서 내다보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어린 또래들 사이에서 난 가끔 우쭐대곤 했다. 울 아버진 사장이라 자랑하기도 하고 금방 부자가 될 거라 뻥도 쳤다. 웃지 못 할 뻥은 한 번도 이뤄진 적 없이 슬프게 끝나긴 했지만 그 뻥 덕분에 기죽지 않고 자랐다. 그 허언 속에는 간절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완고하신 반면에 어머니는 무척 감성적인 분이셨다. 형편없이 팍팍하던 시절 부산 사는 삼년 동안 어머니는 여름이면 사남매를 데리고 해운대며 광안리며 송정으로 피서를 갔다. 아니 피서라기보다 고행이라 해야 옳겠다. 덩치가 제법 컸던 나를 굳이 학생이 아니라고 우기며 공짜 버스를 탈 때면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게다가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나는 동생들 돌보느라 놀 짬도 없었다. 언젠가는 잃어버린 막내를 찾느라 뜨거운 모래사장을 발이 부르트도록 종일 헤집고 다닌 적도 있었다. 세끼 밥 먹기도 버겁던 그때 왜 그리 우릴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는지. 아마 나의 여행 벽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새벽잠도 덜 깬 채 일어나 아이들과 작별인사도 못 하고 고향인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곤 이년 후 마지막으로 서울에 정착하며 우리 가족의 전국구적인 방랑생활은 끝을 맺었다. 서울에 사는 동안 여름만 되면 부산이 그리웠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기보다 이상하게 내가 살았던 궁색한 골목들이 그리웠고 푸른 바다가 그리웠다. 한참동안은 여름이 오는 게 싫을 정도였다. 그 계절이 오면 향수병에 시달리며 마치 타향에 버려진 미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부산 시내지도를 들여다보며 전포동과 범일동 거리를 상상하곤 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스무 살이 넘어선 부산을 몇 번 다녀왔지만 정작 그 동네를 찾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의 연민이 어느 정도 흐려진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불현듯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눈에 띄었다. 범일동 매축지 마을이다. 아파트와 고가차도에 둘러싸여 외로운 섬처럼 고립된 마을. 아직도 한창 범일동 재개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단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다 사라지기 전에 기필코 찾으리라. 더 늦기 전에 눈으로 가슴으로 가득 담으리라.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기차를 타고, 잃었던 마음의 정처 범일동을 만나러 갈 것이다.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난 유년에 대한 결핍을 지금의 시선으로 온전하게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골목에 오래도록 갇혀있던 어린 아이를 이젠 자유롭게 풀어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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