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남도 여행, 강진 가우도 / 2016. 12. 4

정진숙 2016. 12. 8. 22:02


“아, 아, 이장입니다.

보옥리 주민 여러분, 간밤에 누가 쓰레기를 소각하다가 불이 났습니다.

불이 산으로 번지고 있으니 모두 불 끄는데 협조 바랍니다.

주민 여러분은 지금 바로 물 한양동이씩 들고 산으로 나와 주시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분명 꿈은 아닌 것 같고.

깜깜한 새벽녘에 악센트 강한 전라도 억양의 멘트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온다.

어디서 불이 난 건가.

창밖으로 붉은빛이 비치지 않는 걸 보니 큰불은 아닌 것 같다.

궁금해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불길은 보이질 않는다.

그래, 차라리 별일 아닌 게 다행이다.

아침 조반이 차려진 보옥민박 부엌방에서 쥔장께 여쭤봤다.

새벽에 불 난 건 어찌되었느냐고.

주인장 왈, 방송은 이 마을이장인 본인이 한 거라며 신바람 나게 말씀하신다.

소각장이 내년에 준공될 예정인데 그전까진 개별적으로 쓰레기소각을 한단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놀랄 것도 없다고.

때 아닌 불 소동에 화들짝 놀라

혼자 가슴 쿵쾅거린 걸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난다.

여행의 재미는 이런 의외성에 있다.

가끔씩 맞닥뜨리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

섬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또 다른 삶들


남도여행 둘째 날이다.

스피커소리에 잠을 깨서 모두 이른 아침을 시작한다.

어제 못 다한 흥을 해장술로 푸는 산우들도 계시고

몇 분은 민박집 마당을 배회하신다.

공룡알해변을 가기 위해 산우 몇 분이 나선다.

가로등 켜진 길을 따라 나도 같이 바닷가로 내려간다.

어둠 속에서 옅은 파도소리만 들릴 뿐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다.

해변은 바다 쪽으로 급하게 경사져 있다.

돌무더기만 가득한 바닷가,

동글동글 크고 작은 돌 더미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본다.

12월 겨울바다에 훈훈한 바람이 불고 있다.

 

땅끝으로 가기 위해 첫배를 탄다.

꽤 먼 바닷길을 건너 다시 뭍으로 나왔다.

아침바다의 풍광을 건성으로 바라본다.

익숙함이란 이렇게 무섭다.

바다를 보며 설레고 들뜨던 맘이 단 하루 만에 익숙함으로 변하다니.

그럼에도 새로운 길 강진으로 가는 맘은 여전히 설렌다.

 

백련사 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은 동백숲이다.

고목 위 막 꽃망울 터트리기 시작한 어린 동백꽃

수줍다 말할까. 부끄럽다 말할까.

망설이는 것처럼 자그마한 꽃망울들이 곱고 예쁘다.

뚝뚝 떨어진 꽃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꽃말이 자살이라는 동백꽃

동백꽃 진자리는 그래서 처연한가보다.

바다를 바라보는 해월루 누각에서

운산님의 대금연주가 시작된다.

초겨울 무채색 풍경과 어우러지는 우리의 가락

한 템포 쉬어가는 이 여유로움이 참 좋다.

 

바닷길을 건너가는 가우도 출렁다리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월곳지에서 다리를 건너 섬 반대편 저두리로 넘어가는 길에

가우도 영랑쉼터를 지난다.

유목민대장님이 공모에 뽑혀 조성된 장소라 하니

인연이 있는 우리에겐 더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바다로 돌출된 데크 위에서 영랑의 시 한편 읽는다.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내가 보내기 까지는

나의 봄은 아직 가지 않을 테요!

 

113, 다채로운 일정의 남도테마 여행이었다.

꽉 채워진 3일을 마무리하는 지금 시간이 아쉽다.

원 없이 즐거웠고 원 없이 유쾌했던 여정

산우들과 또 하나의 기분 좋은 추억을 만들고 돌아간다.

한 사람의 베풂이 스물일곱 개의 행복이 되었다.

아마 더 큰 행복으로 베푼 이에게 되돌아갈 걸 믿는다.

행복한 남도길, 귀한 시간 함께한 이들께 감사드린다.

다음 길에서 우리 다시 만나는 인연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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