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남도 여행, 완도 보길도 / 2016. 12. 3

정진숙 2016. 12. 9. 10:23



너무 오랜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대상을 어느 순간 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난 봄 미리 예정되었던 남도 여행길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하루하루 지나고 날짜가 다가오자 정작 바쁜 일상에 매여 소원해지고 있었다.

전날이 되어서야 급하게 짐을 챙겼다.

퇴근 후, 챙겨 둔 배낭을 메고 집에서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어디세요? 왜, 아직 안 오셔요.”

이게 무슨 말인가. 산악회 회장님의 전화였다.

“네? 저 지금 집에서 나가려는데요.

12시 출발 아닌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오만가지 생각이 스친다.

밤 11시 출발이란다.

맙소사, 전화 받은 그때가 11시이니.

무박 산행은 의례 12시에 출발했었기에

당연히 12시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 더 일정을 꼼꼼히 확인하지 못한 게 큰 불찰이었다.

그나저나 이를 어쩌나.

얼마나 고대했는데 이렇게 못 가고 마는 건가.

일행들에겐 또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머릿속이 하얘지며 어질어질해졌다.

고맙게도 회장님께서 버스기사님에게 양해를 구해

집 근처를 경유해 가는 것으로 아찔한 상황은 종료되었다.

 

뜻하지 않은 해프닝에 어렵사리 동행한 남도여행길.

어찌 되었건 무사히 남도행 버스에 탑승한다.

늦은 밤 선잠 깬 일행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푹 숙이고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잠도 오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차 창밖 어둠을 바라보았다.

1시 30분, 깜빡 조는 사이 여산휴게소로 버스가 들어선다.

산우 한 분이 탑승하시고 차는 유목민대장님을 픽업하러 광주로 향한다.

여러 해 산행을 같이하는 동안 중간에서 합류하곤 했던 두 분

자주 못 보는 인연이지만 만날 땐 반갑고 헤어질 땐 늘 서운하다.

1무 1박 3일, 광주를 끝으로 함께할 이들이 모두 모였다.

이 밤을 달려 해남 땅끝을 지나 일출명소이자 첫 행선지인 완도 상황봉으로 간다.

 

새벽 5시다.

검은 하늘 위 별빛이 선명하다.

맑은 일기 덕분에 제대로 일출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겨울임에도 완도의 공기는 포근하다.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마치고 해발 644미터 상황봉 산행을 시작한다.

푹신한 낙엽길이 오르막 내내 이어진다.

낮은 해발에서 시작하는 섬 산행 특유의 가파름에

어느새 땀이 배어난다.

일출을 놓치지 않으려고 렌턴 불빛에 의지해 부지런히 걷는다.

여명 속에 보이는 숲의 짙은 실루엣이 범상치 않다.

키 큰 소나무와 활엽수의 어우러짐이 울창한 숲임을 짐작케 한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고 있다.

다급한 맘에 숲을 벗어나 왼편으로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앞을 바라본다.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다도해의 섬들

섬과 섬 사이 피어난 옅은 해무

흐릿하던 바다 위로 진홍빛이 번져가고 있다.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흰 구름은 붉은 빛으로 물든다.

일출이다!

아무런 수사가 필요없는 감동의 순간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 이외엔.

상황봉 정상에서가 아니면 어떠랴.

그 자리에 서서 황홀한 색의 향연을 외마디 탄성으로 맞이한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사이 붉게 솟은 태양은 금세 하얀 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눈부신 금빛은 사위고 이젠 완연한 아침이다.

바다 위 장엄하던 해돋이는 아쉬운 여운을 남기고 스러진다.

 

완도 여객터미널 근처 학림에서 푸짐한 횟감으로 넉넉한 점심식사를 한다.

한껏 기분 업 되어 도착한 정도리 해변 구계등

시 한편의 서정을 전하고픈 대장님의 문학적 감성은 맘에 닿지 못하고

우린 그저 즐겁고 흥에 겨울 따름이다.

급기야는 나의 휴대폰이 바닷물에 빠져 익사해도 그다지 속상하지가 않다.

동글동글 예쁜 몽돌 해변에 엎드려 모델이 되어보고

짠 바닷물에 살아남은 멋진 나목을 배경으로 포즈도 취하며

여행 첫날의 들뜬 마음을 마구 발산한다.

마음 맞는 이들과의 여행은 무조건 신난다.

화흥포에서 노화도 가는 배를 타고

뱃전에서의 한바탕 여흥, 흥겨움 두 배의 여행이다.

 

잠깐 조는 사이 노화도에서 보길도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

좋은 풍광을 놓친 아쉬움은 잠시고

동천 석실을 보고 얕은 돌담길을 지나 낙서재로 가는 길이 즐겁다.

윤선도원림 세연정, 선비 윤선도가 남긴 풍류의 흔적들

그때의 역사야 어찌 흘렀건 원성을 사던 윤선도의 그 행적들이

지금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세상사 참 재밌다.

 

다도해에 펼쳐진 수많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다는 망끝전망대로 향한다.

일몰에 물들어가는 망끝 넓은 데크에서 깜짝 이벤트가 펼쳐진다.

생일 케잌 하나로도 이렇게 유쾌해질 수 있다니.

하루 종일 엔돌핀 폭발한 일정을 마치고 숙소인 보옥민박으로 가고 있다.

입담 좋은 쥔장과 음식솜씨 좋은 마나님의 조합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보옥리는 살림살이가 무척 여유로워 보이는 동네다.

바닷가 자그마한 마을이 섬 마을답잖게 말쑥하고 정갈하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는 뽀쪽산 기슭 보옥리

소박한 바다진미로 넉넉하게 차려낸 밥상 앞에서

쥔장의 걸출한 입담은 섬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아들만 셋이라는 그이는 동행한 어린 기자가 맘 쓰이는지

밥을 그리 못 먹어서 쓰냐며 푹푹 많이 먹어라 채근하신다.

 

공룡알 해변의 대금 연주는 실내공연으로 변경되었다.

밤을 새워 놀자 다짐들을 하더니 과한 여흥에 모두 일찌감치 잠들었다.

그냥 잠드는 게 억울했던 나는

산우 한분과 기어이 해변 한바퀴를 돌고 들어왔다.

그렇게 짧고 강렬하게 보낸 밤,

무박으로 열었던 긴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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