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대

정진숙 2017. 1. 10. 14:52

집을 나서는 길에 눈에 띈

보라빛 달개비, 분홍색 분꽃, 붉은 백일홍

아파트 화단 꽃들이 유난히 청초하다.

이른아침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푸르고

마음은 하늘 위로 날아오를 것 같이 들뜬다.

 

수원역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선다.

오늘은 어떤 하루가 기다릴까.

저만치서 부산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설렘과 기대는 크고 진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한껏 감상에 젖을 준비를 한다.

 

작은 노트를 꺼내 한 페이지 정도 채웠을까.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으신다.

어디까지 가세요?

 

아, 혼자 조용히 가고싶었는데..

아주머니는 태생지인 청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스물한 살에 결혼한 이야기

아들 딸 키워 분가시킨 일

십여년 전 전원주택 지어 사는 것까지.

인생 풀스토리를 들려주시고

전원주택이 있는 옥천에서 조금 전에 내리셨다.

홀로 여행하는 내가

참 부럽다고 하시면서.

 

이 삭막한 익명성의 시대에

모르는 남에게 허물없이 인생을 쏟아낼 수 있는

아주머니의 순박함이 사실 나는 더 부러웠다.

나를 방어하는 것에 익숙해져

무방비로 전해 듣는 타인의 인생이야기가

솔직히 첨엔 좀 성가셨다.

그런데 어느 새 같이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싶기도 하고.

 

아주머니가 내린 빈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나선 길

기대는 늘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 모양이다.

 

벌써 김천역이다.

기찻길 옆 초록빛 풍성한 여름 풍경이

아주머니의 입담처럼 정겹게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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