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안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간다.
어느 이른 봄 하동 섬진강변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여인이다.
해괴한 나무 조각상 앞에 벌떡주라 쓴 종이푯말이 붙은 가판대 옆으로
보리새우가 담긴 플라스틱 통과 고추장 한 종지가 낡은 원탁에 놓여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가판대 옆 의자에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동둥주 잔술에 이 천 원, 가볍게 한잔을 마셨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진한 약재의 풍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내의 어수룩한 행색과는 너무도 다른 도회적인 그의 아내
몸에 밀착된 최신유행의 아웃도어 제품을 올 블랙으로 차려입은 매무새가
시골장터의 늙수그레한 남자의 아낙으론 보이질 않았다.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몸매의 비결이 무어냐고 궁금해서 물었더니
매일 빼놓지 않고 지리산을 몇 년째 오르내린 덕분이라고 했다.
어쩌다가 화개에 정착하게 된 것도 남편의 건강을 되찾으려는 이유라며.
그러고 보니 사내은 어딘가 병색이 도는 듯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도 아낙이 좋은 약재로 건사해 많이 나아진 거라 한다.
벌떡주, 조금 요상한 이름의 매실동동주는 그녀가 만든 걸작품이다.
달작지근하게 톡 쏘는 첫맛, 입안에 약초향이 한가득 번지는 약술
이 필생의 역작은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남편을 위해 이것저것 시도하다 운 좋게 약술을 개발한 것인데
이 술이 효자가 되었다.
화개장터 한구석에 가판대를 두고 잔술을 팔기 시작하며 입소문을 탔다고 한다.
같은 이름의 술로 하동송림에 가판대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아들에게 그 일대영업권을 준 것이라 말한다.
상표등록도 이미 마쳤고 작지만 가내기업을 이룬 것이다.
나와 무관한 이의 성공에 기분 좋았던 첫 만남이다.
서너 해 지나서 화개장터를 다시 찾았다.
한구석에 있던 부부의 수레를 찾아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더 둘러보다 다른 장소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해마다 자리를 무작위로 추첨하여 정하는데 그해는 그 자리가 뽑힌 거란다.
그건 그렇고 바깥주인은 어디 가셨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안타깝게도 두해 전 명을 달리하셨다는 것이다.
괜한 걸 물어보아 심란케 해서 미안하다, 거듭 사과했다.
그녀는 사람 일을 맘대로 할 수 없으니 어쩌냐며 되레 초연했다.
그 후로도 섬진강변을 찾을 때마다 화개장터를 찾았다.
그녀는 늘 씩씩하게 잘 살고 있었다.
지리산 종주에 동행한 동창부부와 남편에게 벌떡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대감 상승으로 꼭 들렀다 가자며 백무동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를 그냥 보냈다.
쉽게 갈 길을 돌고 돌아 화개로 갔다.
2박 3일의 종주를 마치고 먼 길 그냥 가기 서운해 화개를 찾기로 한 것이다.
함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진주로, 진주에서 택시를 타고 화개로
몸이 고되니 머리도 굳었나 보다.
어이없는 루트로 힘겹게 도착한 섬진강변 화개장터
8월 무더위 속 장터는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봄과 가을 늘 붐비는 계절에 오곤 하여 이런 한가로운 광경이 무척 낯설었다.
관광객보다 상인들이 더 많은 장터가 뙤약볕 아래 축 늘어져 있었다.
매번 들르곤 하는 옥화주막에서 재첩국으로 요기를 하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 사이 돈을 많이 번 건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건강한 몸매로 타이트한 탱크탑에 블랙스키니를 입고 있다.
경상도여인의 무표정한 얼굴로 시크하게 우리를 맞아준다.
잘 지내셨냐며 내가 더 반가워한다.
그녀는 가끔씩 들르는 나를 잘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근처에 올 때면
어쩌다 한 번 만나곤 하는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지곤 했다.
더 예뻐지셨네요, 하고 운을 띄웠다.
이젠 숫자가 많아져 조금 고되고 힘들단다.
어언 십 년을 보아온 이름 모를 여인.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으니 그녀도 나처럼 늙어가나 보다.
그녀가 만든 매실동동주 한병을 사들고 돌아가는 길에
슬그머니 뒤돌아보며 맘속으로 빌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만나는 인연이지만 오래도록 이어가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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