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남영동 야곡

정진숙 2019. 10. 26. 08:55

 

 

 

허름한 건물 사이로 난 골목길에 들어섰다.

노출 콘크리트의 시크한 레스토랑 뒤편으로

평범한 추어탕 집이 보인다.

음악회에 가기 전 저녁식사를 할 곳이다.

뭔가 부조화 된 메뉴지만 어떠랴.

보글보글 뚝배기에 끓여 나온 추어탕을 맛나게 먹었다.

 

정갈한 소도시의 어느 길과 닮은 듯한

뉴트로풍의 남영동 골목을 빠져나와 건널목을 건넜다.

디저트로는 스타벅스 커피

아메리카노와 호두당근 치즈케잌을 앞에 두고

나직한 수다삼매경이 이어진다.

노트북을 펼친 카공족과 코피스족 사이에서

은근한 눈총을 받아가며

우린 커피 세잔의 권리를 꿋꿋이 누리고 일어섰다.

 

공연 시작 전 십 분 여를 남겨두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용산갤러리를 향해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얕은 시멘트 블럭 담장 너머로 침울한 미군부대 건물 몇 채가

대로변 오른편에 여전하게 남아있었다.

출입구를 찾을 수 없어 철제문이 열려있는 경비초소 앞을

막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잠깐만이요.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초소 안의 경비원이 황급히 막아선다.

살짝 당황한 우리는 공연장으로 가는 길인데

입구가 어디냐고 되물었다.

 

어이없는 표정의 경비원님 왈

"여기는 미군부대예요."

공연장은 아니니 나가시라는 말씀이다.

어이없기는 세 여인도 마찬가지다.

바로 옆 철망 너머 용산갤러리가 버젓이 보였다.

 

"아니, 7시 공연 티켓이 있는데요.

그럼 어디서 한다는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여기는 아닙니다."

시간은 촉박한데 난감한 일이다.

 

그때 철조망 너머로 두 아가씨가 등장한다.

"여긴 전시장이고 공연장은 없어요.

아마 장소를 잘못 아신 것 같은데요."

 

착각한 이유가 있었다.

동명의 콘서트홀이 근처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느긋하게 나왔으니.

 

삼각지 로터리 도로 위는 퇴근길 차량으로 사방 막혔고

택시를 타는 것도, 전철을 타는 것도 애매한 위치라 대략난감이다.

공연 기획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감감무소식

별 수 없이 지도 앱을 보며 예의 장소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통화가 되어 서둘러 걷던 찰나

이번엔 때 아닌 소낙비가 쏟아진다.

멀쩡하던 날씨에 이 무슨 도깨비장난 같은 상황인지.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지하도에서 잠시 비를 피하는 사이 소나기는 지나갔다.

밤이 되자 휘황해진 용산역 일대의 야경은

도대체 공연장이 근처에 있을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지도만으로 미심쩍어 길 가는 행인에게 한 번 더 묻고는

어렵사리 용산갤러리 콘서트홀 입구에 도착했다.

공연장은 화려한 불야성에 둘러싸인 낡은 건물 5층에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간판을 재차 확인하고 어둑한 계단을 올라갔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마지막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무공간을 갤러리겸 콘서트홀로 운영하는 모양이다.

객석도 따로 없이 철제 의자 백여 개를 놓고 오밀조밀 앉은 사람들 틈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빈 좌석을 찾아 앉았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신기함

이런 콘서트도 있구나 싶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게스트가 바뀌고 어쿠스틱 기타의 투박한 울림과 함께

숨을 턱 멎게 만드는 묵직한 보이스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정태춘의 곡 <빈 산>을 읊조리듯 노래하는 가객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말문이 막히게 하는 음색이다.

안동에서 왔다는 음유시인 보헤미안

자유로운 영혼의 진한 회색빛 목소리라는 문구가

아티스트 보헤미안을 부연 설명하고 있었다.

 

남영동 추어탕 집과

숙대 앞 스타벅스

미군부대와 용산갤러리

소나기와 콘서트

뭔가 이질적인 것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전해졌다.

 

뜻밖의 선물처럼 고마웠던 밤

남영동 스테이크골목에서 시작된 늦여름의 신기한 하루.

살다보니 이런 의외의 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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