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봄마중 기차여행, 하동 평사리

정진숙 2021. 9. 1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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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한 봄길 남도의 들녘으로 떠난다. 하얀 모래톱 끝에서 은빛 금빛으로 반짝이는 섬진강변을 올 봄에도 찾아간다.

3월, 혹은 4월이면 봄을 앓듯 섬진강을 향하는 상사병. 꽃비 흩날리는 강변의 해사시한 웃음 아른거릴 때 마음 한없이 두드리는 그 강을 만나러 이 봄도 길을 나섰다.

남도대교 아래 잔잔한 윤슬, 화개장터 옆 붉은 개복숭아꽃 나무, 동동주 한 잔술 파는 장터 과수댁에 한해살이 안부를 건네고, 지리산 자락을 넘어온 따가운 봄 햇살 받으며 마음 한껏 흔드는 그 강을 향해 달려간다. 봄이 오는 길 1번지, 춘사월 하동을 만나러.

고소성 위에 올라서면 마음 고즈넉해지는 절경을 마주하게 된다. 드넓은 평사리 들녘과 아득하게 휘도는 섬진강 물길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생각지 못했던 강 하구의 멋진 풍광에 저절로 탄성이 터진다.

하동사람들이 성제봉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기는 형제봉 오름 길에 800m의 성곽은 잘 감춰져있다. 평사리 뒷산, 지리산에서 뻗어 내려온 성제봉 300m 고지에 자리한 옛 성은 험한 산줄기를 등지고 서남쪽으로는 섬진강과 동정호를 눈 아래 둔 요충지로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쥐고 있는 위치에 있다. 섬진강 물길로 이동하는 적의 동태를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고소성은 그 옛날 대가야의 고성이다. 오래 전 허물어졌던 성곽이 제법 모양을 갖춰 튼실하게 복원되었다. 널찍한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성. 천 년 세월 동안 조금씩 허물어져 여기저기 흩어진 돌 더미들을 모아 새로 쌓아올린 성벽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 그늘 등걸에 기대앉아 망연히 섬진강을 바라보았다. 이 산, 이 강, 이 성곽에 비하면 인생사 참 짧지 않은가. 아옹다옹 할 것 없이 그저 고요히 살다가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봄날의 고소성, 한발 물러나 나를 바라보았던 시간들과 아련한 그 풍경이 해마다 봄이 오면 평사리로 이른 봄마중을 기어이 나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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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그리워지는 풍경들이 있다. 잃어버린 기억 속 어디쯤인 듯 그곳에 가면 저절로 편안해지는. 그 중 하나가 하동 평사리이다. 언덕 위 최참판댁 담장 너머로 바라보는 무딤이 들은 그런 아득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참판댁 돌담 곁문을 나서면 성큼 다가서는 너른 들녘이 갑갑하던 숨길을 탁트이게 한다. 오랫동안 그리던 맘 담아 아련한 눈빛으로 들판을 바라본다. 지리산 자락이 포근히 감싸 안은 푸르른 들녘이 까슬까슬한 마음안으로 너그러이 스며든다. 먼 길 달려온 수고로움의 대가는 이 풍경 하나로 족하다. 무념무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산길 들길의 안온함은 복잡하던 그 무엇이라도 편안히 내려놓게 만든다.

무딤이 들은 오래도록 섬진강물이 들고나던 천수답 논이었다. 세상 좋아져서 반듯반듯한 농경지로 탈바꿈했지만 장마철 강물이 넘나들 때마다 사람들을 고생스럽게 만들던 들판이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아기가 젖 삼키는 소리, 소 여물 씹는 소리를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세 가지 소리라 했다. 그 세 가지 모두가 생명을 기르는 소리들이다. 봄이 오는 평사리 들녘엔 생명을 기르는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하다. 논에 물 대는 소리, 파릇하게 새싹 돋는 소리, 짝짓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판 한 가운데 청청하게 서있는 부부송에는 갸륵한 사연이 있었다. 살아생전 금슬 좋았던 의령박씨 부부의 묘가 부부송 옆에 나란히 있다고 한다. 후손들이 아직도 두 부부를 기리며 부부송과 묘 주변을 보살피고 제를 지낸다하니 오늘의 풍요로움이 조상의 은덕은 아닌지.

평사리 최참판댁에 들어서면 허구의 인물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강고한 힘을 느끼게 된다. 평범한 농촌마을에 지나지 않았을 평사리를 사시사철 사람들이 찾아드는 명소로 만들었으니 소설 토지는 한 마을에 새로운 운명을 선사한 셈이다.

살아온 지난 세월이 어떠했든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축복받은 땅임에 틀림없다. 유장한 지리산 긴 능선이 마지막 기운을 풀어놓은 끝자락에 섬진강물길이 실어나른 하구의 풍요가 더해진 천혜의 명당.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그러워지는 그 들녘이 이 봄도 내게 위로를 건넨다.

2018. 3.
노고단일출 - 고소성 - 평사리문학관 - 화개장터 - 섬진강변

2019. 4.
성삼재-노고단-천은사-사성암-화개장터-고소성-최참판댁-평사리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