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근대로의 기차여행, 부산

정진숙 2021. 9. 1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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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되돌아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시의 하고많은 멋진 경관 중에 구태여 낡고 오랜 원도심을 둘러보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젠 뒤돌아 볼 여유가 생긴 때문일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팍팍한 순간을 지나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관조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생긴 때문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조금은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멋지진 않지만 낡고 오랜 것이 주는 편안함과 위로가 숨 가쁘게 변해가는 지금에 마음의 쉼터를 만들어준다. 내달리는 시간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는 곳, 그때 그 시절로 떠나는 부산여행. 어린 시절 두어 해를 머문 원도심으로 옛날을 만나러 간다.

나의 옛날을 찾아 가는 그길. 조금은 헐렁한 마음으로 떠나도 되련만 촘촘히 계획을 세우고 일정표를 짜고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냥 편안히 나서도 괜찮을 텐데. 그럼에도 가야할 곳의 버스 노선과 소요시간, 사전 정보를 탐색하며 늘 하던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그 어떤 것이든 어긋날 수 있음이 전제된다. 12시 50분, 마침 점심시간이라 부산역에 도착하면 근처 밀면 맛 집을 가기로 맘먹었다. 역 광장 왼편 골목길을 걸어서 당도한 식당, 하필이면 휴일이었다. 첫 목적지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도 못하고 기운도 없는 터라 허탈해진다. 하는 수 없이 길 건너 초량 맛 집으로 목적지를 수정하고 범일동을 먼저 만나러 간다.

검색한 번호의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 난간을 오르며 성남초등학교 앞에 가냐고 물었다. 아니라면서 어딘지 잘 모르겠단다. 82번, 분명 82번 버스였는데, 버스기사님이 모른다 하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아주머니 한분께 물어 다른 버스에 오르며 또 물었다. 이 기사님도 갸우뚱하신다. 뭐가 잘못된 걸까.

이유는 애시 당초 잘못된 질문을 내가 했던 것이다. 학교 앞이 아니라 진시장 앞에 가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맘속 장소에 몰입하느라 내 생각대로 질문한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기사님이 진시장 앞이냐고 되물어 주신 덕분에 옛 모교 성남초등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

서너 시간 남짓 걸어 옛 동네와 어릴 적 놀던 길을 돌아보았다. 허기가 져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즈음 초량으로 되돌아와 왔다. 발걸음은 더디고 찾고자 하는 식당의 위치가 명확치 않아 불안하다. 그때 우연히 눈에 띈 곳이 카페 브라운핸즈 백제다. 급한 대로 차 한 잔으로 갈증을 풀었다. 여긴 원래 방문할 예정이 없던 장소였다. 지나쳤더라면 후회할 뻔했다. 건물의 지난 역사를 감추지 않고 현재에 잘 표현해낸 인테리어가 멋스럽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계속 머물고 싶은 매혹적인 공간이었다.

카페 직원에게 물어 가려던 중식당의 위치를 알아냈다. 얼른 신발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4시가 넘어서야 겨우 첫 끼니를 해결하게 되다니. 어, 그런데 이번에도 뭔가 심상치 않다. 길게 늘어선 줄이 있어야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 너무해. 이곳도 역시, 휴일이었다.

두 번이나 바람 맞고 의문의 2패를 당한다. 하는 수 없이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 도착한 이바구충전소. 부산항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조망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한동안 넋놓고 도심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168계단 옆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와 밥집 도시락국에서 시락국으로 늦은 한 끼를 떼운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나의 옛날을 돌아보는 부산여행이다. 계획한 대로 순탄하길 바란 건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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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대한 결핍은 어떤 형태로든 채워지길 바라게 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지독한 천착은 내면에 잠재된 강한 보상심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왜 그토록 내가 살아온 흔적을 찾으려 애썼던 것일까. 답은 내 성장기의 정체성을 말해 줄 어떤 것도 현재에 남아있지 않음에 있었다. 나고 자란 터전을 잃은 상실감은 가끔씩 공허함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인지 어딘가에 안착하지 못한 불안정감이 늘 따라다녔던 것 같다.

서울에 정착하기 전 어릴 적 12년간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우리 가족은 자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는 고달픔은 성장기 아이에게 큰 트라우마였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아이가 견디기엔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늘상 그리움에 시달렸다. 떠나온 것에 대한 연민을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 버렸다.

부산은 예닐곱 살 무렵의 한 해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에서 3학년 1학기까지 삼년 남짓 살던 곳이다. 그 짧은 사이에도 네 번이나 이사를 했으니. 전포동에 살던 일 년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범일동에서 살았다.

첫 집은 시장 근처 철길이 지나가는 곳 옆이었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 담장 너머로 기찻길이 보였다. 담장 옆에 기대서서 달리는 기차를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곤 했다. 하루에 수도 없이 지나가는 기차는 꼬맹이인 내게 반가운 친구였다.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난간에 서서 같이 손을 흔들어주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1966년경이니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내려온 군인들이 부산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월남으로 떠나던 때였다. 뭔지도 모르고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던 장면이 생생하다.

잠시 태생지인 대구로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이사 온 곳은 전포동이다. 가파른 골목길의 빼곡한 집들 사이로 학교를 가려면 숨을 헉헉대고 걸어야 했다. 나무로 지은 단층 교사는 겨울에 무척 추웠다. 고사리 손으로 쇠 난로에 조개탄을 넣던 게 생각난다.

1학년 가을의 어이없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아침에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데 아이들이 줄을 지어 교문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뭐지 하던 순간. 아뿔싸, 소풍가는 날이었다. 바쁜 엄마에게 내일 소풍날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고 신나게 놀다가 깜빡 했던 것이다. 집으로 달려가 엉엉 울며 떼를 써봐야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르고 달래도 안 되겠던지 엄마는 우리끼리라도 소풍을 가자며 이것저것 준비해 집을 나섰다. 동생 둘은 걸리고 막내는 업고 뒷산인 돌산으로 소풍을 갔다. 단풍든 나무와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가을바람에 하얀 억새가 흔들리던 풍경이 또렷이 떠오른다. 참 별일이다. 왜 이런 장면에서 먹먹해지는 건지.

집을 다시 옮기며 전포동 성북초등학교에서 범일동 성남초등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평지에 있었다. 좁은 골목은 여전했다. 한술 더 떠서 좁다 못해 방문과 방문이 한 걸음 폭으로 마주 보였다. 판자로 칸막이된 벽에 합판으로 만든 미닫이 문. 그런 판자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몇 개의 골목이 연달아 있었다. 우리 방에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옆집에서 금방 대답을 들을 만큼의 거리였다. 방 두 칸 사이에 백열등 하나를 걸어 같이 쓰는 집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불과 십 수 년 후의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풍경이다.

이 동네가 매축지 마을이란 걸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신기한 별세계 인터넷 세상 덕분이다. 어느 사진에선가 낯익은 골목풍경을 보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살던 그 골목이었다. 아직 그대로 있다니. 꼭 일 년을 살았지만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났기에 아쉬움을 남기고 왔던 곳이다. 어디서든 비슷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애썼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 가난한 것이 무언지 남루한 것이 무언지 몰랐다. 그곳이 일제 때 항만 인근 물웅덩이들을 매립한 땅이며, 말을 부리던 인부와 짐꾼들이 머물던 곳이며, 6.25 때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란 것도 몰랐다. 그저 따뜻하고 정 많은 이들이 살았던 데라는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마치 잃었던 고향을 되찾은 것처럼 반가웠다.

아버지는 봉제공장 사장님이셨다. 공장 이층 창문에서 내다보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어린 또래들 사이에서 난 가끔 우쭐대곤 했다. 울 아버진 사장이라 자랑하기도 하고 금방 부자가 될 거라 뻥도 쳤다. 웃지 못 할 그 뻥은 한 번도 이뤄진 적 없이 슬프게 끝나긴 했지만 덕분에 기죽지 않고 자랐다. 그 허언 속에는 철부지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완고하신 반면에 어머니는 무척 감성적인 분이셨다. 형편없이 팍팍하던 시절 부산 사는 삼년 동안에 어머니는 여름이면 사남매를 데리고 해운대며 광안리며 송정으로 피서를 갔다. 아니 피서라기보다 고행이라 해야 옳겠다. 덩치가 제법 컸던 나를 굳이 학생이 아니라고 우기며 공짜 버스를 탈 때면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게다가 해수욕장에 도착하면 나는 동생들 돌보느라 제대로 놀아볼 짬도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잃어버린 막내를 찾느라 뜨거운 모래사장을 발이 부르트도록 종일 헤집고 다닌 적도 있었다. 세끼 밥 먹기도 버겁던 그때 어머닌 왜 그리 여기저기로 우릴 데리고 다니셨는지. 아마 나의 여행 벽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인지도 모른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새벽잠도 덜 깬 채 일어나 아이들과 작별인사도 못 하고 고향인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곤 이년 후 마지막으로 서울에 정착하며 우리 가족의 전국구적인 방랑생활은 끝을 맺었다. 서울에 사는 동안 여름만 되면 부산이 그리웠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기보다 이상하게 내가 살았던 궁색한 골목들이 그리웠고 푸른 바다가 그리웠다. 한참동안은 여름이 오는 게 싫을 정도였다. 그 계절이 오면 향수병에 시달리며 마치 타향에 버려진 미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부산 시내지도를 들여다보며 전포동과 범일동 길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스무 살이 넘어선 부산을 몇 번 다녀왔지만 정작 그 동네를 찾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의 연민이 어느 정도 흐려진 때문일 테지만, 불현듯 그리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에 띈 범일동 매축지 마을. 아파트와 고가차도에 둘러싸여 외로운 섬처럼 마을은 고립되어 있었다. 지금도 한창 범일동 재개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단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다 사라지기 전에 기필코 찾으리라. 더 늦기 전에 눈으로 가슴으로 가득 담으리라. 이 여름이 가기 전에 기차를 타고, 잃었던 마음의 정처 범일동을 만나러 갈 것이다. 작별인사도 못하고 떠난 유년에 대한 결핍을 지금의 시선으로 온전하게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갇혀있던 그 골목의 아이를 편안하게 놓아줄 작정이다.



2019. 5
1일차, 부산역-초량이바구길-남선창고-브라운핸즈 백제-168계단-김민부전망대-해운대-이바구충전소

2일차, 태종대-감천마을-자갈치시장-용두산공원-차이나타운-부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