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정진숙 2022. 2. 28. 12:22










그는 전차 끊어진 밤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던 슬픈 눈의 화가였다. 미군 피엑스 초상화부의 옥희도 씨가 며칠 째 나오지 않았다. 명동에서 창신동까지 화가의 집을 찾아갔던 주인공의 이야기를 박완서님은 소설 나목에서 묘사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방 한 켠 빼곡히 세워진 그림들 사이 캔버스 위 미완의 그림 한 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잎새 모두 져버린 한겨울 고목이었다.

박완서 님은 소설가 지망생 시기 박수근 화백과 전후 한 공간에서 일했던 실제 이야기를 소설 나목으로 엮어 여성동아 공모에 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했다. 여고 입학 무렵 학교 신문 숙란에 선배인 박완서 님의 그 소설이 연재되고 있었다. 설렘으로 선망하며 읽었던 앳된 기억.

소설 나목의 결말은 미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던 대화가 옥 선생의 유작전에서 그때 보았던 고목이 나목이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헐벗고 외로운 그 겨울나무가 생의 온기 모두 사라진 고목이 아니라 새봄의 소생을 묵묵하게 기다리는 나목이었음을.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 들 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 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 화백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박완서 님의 소설 나목에 대한 자료전도 겸한 전시회였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 추운 시절을 살다 간 예술가를 만나고 왔다. 한 화가의 삶이 또 다른 문학가의 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운 인연의 흔적들을 그곳에서 만났다.

감염병 만연의 시절, 세상 모두가 나목이 되어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긴 겨울 끝에 홀연히 돋아날 새봄의 연초록 잎이 온 세상을 다시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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